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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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자유화 조치와 외국자본 유치

북한이 살 길은 개혁개방뿐이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3-01-14 18:10

사회 : 조선인민이 살 길은 개혁개방 뿐이다, 시간입니다. 수령 독재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간부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학생들과 함께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방도를 살펴봅니다. 윁남의 개혁개방 경험을 살펴보고 있는 데요. 오늘은 열일곱 번째 순서입니다. 무역자유화 조치와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과정에 대해 알아봅니다. 자리에 윤성호방송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윤 : 네, 안녕하십니까?


사회 : 오늘부터 두 차례에 걸쳐 윁남의 개방조치에 대해 알아볼 텐데요. 먼저 경제를 개혁하는 데서 개방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윤 : ‘백지장도 맛들면 낫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서로 힘을 모으면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말인데요. 이 원리는 경제원리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힘을 모으면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죠. 국가 경제와 같은 큰 규모의 경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가 고립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여러 국가들과 서로 협력하는 것이 인민들의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데 더 유리한 것이죠.
오늘날 무역을 확대하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세계 여러 나라들과 경제협력을 하는 것은 경제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규모가 작은 국가의 경우에는 특히 중요하죠.


사회 : 그 동안 조선에서는 민족자립경제를 건설하자는 기치를 들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경제 협력을 하는 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윤 :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어떤 노선이 옳은 노선이냐는 결국 경제발전 수준에 따라 판가름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협력경제노선을 내세운 한국은 경제대국이 되고, 민족자립경제 노선을 내세운 조선 경제는 파탄났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는 민족자립경제노선보다는 국제협력경제노선이 경제발전에 더 적합한 노선이었다는 것을 실증해주었습니다.


사회 : 그렇다면, 민족자립경제 노선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고 봐야하는 것인가요?


윤 : 정확하게 말하면 민족자립경제 노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민족자립경제노선을 잘 못 이해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조선 당국은 국제협력노선과 민족자립경제 노선이 대립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경제가 발전한 선진국가의 도움과 지원을 끌어내지 못했는데요. 국제사회와 협력하지 않는 경제는 정확히 말해서 자립경제가 아니라, 민족고립경제, 민족폐쇄경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경제가 파탄 난 것은 민족고립경제, 민족폐쇄경제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땅도 작고, 인구도 적고, 석유도 안나는 조선이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세계 여러 나라와 적극적으로 협력했어야 했습니다.


사회 : 그렇군요. 자, 경제를 개방하기 위해 윁남 당국이 맨 처음에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윤 : 먼저 서구 선진국 및 그 주변나라들과 정치적 관계를 개선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윁남은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말까지는 캄보디아 침공 문제로 서방 선진국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이모이 정책이 시작된 시점에서 곧바로 서구 선진국과 정치적 관계를 정상화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윁남 공산당 지도부는 경제 선진국과의 관계 개선 없이 경제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중국의 개혁개방 경험을 지켜보며 알게 됩니다.
결국, 윁남 군대는 1989년에 캄보디아에서 철군하고 1991년에 ‘파리 평화협정’을 맺어 서방 선진국과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일본, 유럽연합과의 무역을 정상화했습니다.


사회 : 아무래도 당시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은 역시 미국 아니었습니까? 윁남 경제개방의 핵심 대상도 미국이었을 텐데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윤 :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일본이나 유럽연합보다 훨씬 더 늦어졌는데요. 1995년이 되서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구요. 2000년에야 비로소 무역협정을 체결(2001년 12월에 발효)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경제교류와 협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 : 국제적인 경제협력은 선진국가와의 협력도 중요하지만, 국제경제기국들과의 협력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경제단체들과의 협력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윤 : IMF(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주요 국제금융기구와는 1993년에 관계를 정상화했고, 1994년이 되면 이들 기구로부터 본격적으로 경제 원조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들 세계경제기구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합니다만, 여타 선진국이나 국제원조단체로부터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윁남의 경우는 서방 나라들과 경제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른 나라나 경제기구들이 윁남 정부를 믿고 돈을 빌려주기가 쉽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경제단체들이 윁남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윁남에 대한 나른 나라의 경제적 신뢰도가 높아졌습니다. 그 때문에 윁남을 원조하거나 경제적으로 협력하려는 나라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또, 1995년이 되면 ASEAN에 가입해 아시아 주변국과의 협력관계도 강화하게 됩니다.


사회 : 먼저 국가 간의 정치적 관계를 개선한 후, 경제를 개방했다는 것인데요. 개방정책의 주요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윤 : 크게 네 가지 정도였습니다. 첫째는 무역 자유화, 즉 사회주의적 무역 독점을 철폐했습니다. 둘째, 외환관리제도를 개혁했구요. 셋째, 외국인 직접투자를 허용했습니다. 넷째, 앞의 세가지 정책을 통해 수출산업을 육성한 것입니다.


사회 : 네 가지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역을 자유화했다는 것인데요. 무역을 자유화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윤 : 사회주의 체제는 대외무역을 최소 수준으로 제한하고 가급적 자급자족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었는데요. 윁남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 사회주의 체제가 대외 무역에 소극적인 이유는 우선 계획경제의 원리 자체가 대외무역과 대립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역상대국의 경제활동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산과 가격을 일일이 통제하고 계획해야 하는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가급적 무역을 줄이는 것이 편했던 것이죠.
- 또 대외무역도 경제계획의 일부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는 국영 무역회사가 전담했었습니다.
따라서 무역을 확대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획경제체제를 해체하고 정부에 의한 무역 독점을 철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회 : 무역 독점을 철폐해서 국영기업소 뿐 아니라 모든 기업소들이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윤 :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자, 윁남에 필요한 상품들이 점차 들어오면서 인민생활이 눈에 띠게 좋아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물건이 없어 인민들이 굶거나 불편하게 생활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된 것이죠.


사회 : 무역 독점 철폐하셨다고 했는데, 한꺼번에 철폐한 것입니까? 아니면 점진적으로 철폐한 것입니까?


윤 : 1980년대 말 이후에 약 10여 년 사이에 걸쳐 점진적으로 추진했습니다.
- 윁남에서는 소수의 국영 무역회사가 무역을 독점했었는데요. 1988년부터는 지방정부 및 국유기업에 의한 신규 무역회사 설립을 허용했습니다.
- 또, 1991년부터는 국유기업 및 개인기업이 직접 수출과 수입을 할 수 있게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기업들은 전문 무역기업소는 아니었는데요. 1993년부터는 개인이 운영하는 전문 무역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허용했습니다.


사회 : 무역 자유화라면 수출량이나 수입량, 또 수출입 품목에 대한 통제도 철폐했다는 것 아닙니까?


윤 : 원래는 수출이나 수입 수량을 일일이 통제했었습니다. 그러나 1989년부터는 직접 통제를 철폐하고 대신 수출이나 수입을 할 때에는 국가에 세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일종의 간접적인 통제방식으로 바꾼 것이죠.


사회 : 그러니까 세금을 높게 매기면 수출이나 수입이 줄어들고 세금이 낮으면 수출이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을 이용해 수출입 물량을 간접적으로 조절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것이군요.


윤 : 그렇습니다.


사회 : 관세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윤 : 수입할 때 내는 세금, 즉 수입관세율은 전반적으로는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낮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야 인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많이 들여오고, 또 인민들이 싼 값에 사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제조업 보호를 위해 윁남이 주력하는 업종의 공산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높게 매겼습니다. 이왕이면 윁남 기업들이 생산한 물건을 사서 쓰게 하려는 조치였던 것이죠.


사회 : 무역을 자유화한 이후 윁남의 수출은 얼마나 늘어났습니까?


윤 : 1989년 윁남의 1인당 수출금액은 약 40달러 정도였습니다. 1997년이 되면, 120달러로 늘어나고, 2002년이 되면 200달라가 됩니다. 2005년에는 5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15년만에 열두배 정도 늘어난 것이죠.


사회 : 세 번째 정책은 외국의 투자를 끌어내는 것인데요. 윁남은 언제부터 외국 투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까?


윤 : 윁남은 1980년대 말부터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한 1997년 이후 몇 년간 직접투자도 하락세를 보였습니다만, 2000년대 들어 다시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 재정상황이 좋지 았았던 윁남은 외부의 원조를 끌어들이는 데 훨씬 적극적이었구요. 그 결과 외국의 원조와 직접투자가 윁남의 사회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회 : 윁남이 끌어들인 외국자본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윤 : 1990년에는 윁남 인민 1인당 약 6~7달러 정도였습니다. 원조와 외국인 직접투자를 합한 것인데요. 4년이 지난 1994년에는 무려 40달러로 늘어났습니다. 일곱배 이상 늘어난 것이죠. 그 만큼 윁남 정부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사회 : 그렇군요. 네, 오늘은 윁남의 개방정책 가운데 무역자유화 조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역시 윁남의 개방정책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윤성호 방송원 감사합니다.


윤 :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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