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동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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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살이에 첫걸음

북한 동포들의 이야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5-04-30 16:57


남편을 병으로 잃고, 죽어라 일을 하지만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길이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한 끝에 어린 자식들의 손을 잡고 중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길은 어린 자식들과의 생이별의 길이 되었다. 중국에서 딸아이들과 나는 그만 인신매매를 당하고 말았다. 인신매매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사람 저 사람을 거쳐 팔려가 우리 네 모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손톱이 다 빠지고 손가락이 비틀어지는 중노동을 감내해야 했고, 겨울철엔 공안들에게 쫓겨 산에서 숨어 지내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짓물러지는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중국에서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낸 뒤 나는 꿈에도 그리던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처음 한국에 와서 참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하나하나 열거할 수는 없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고마움과 감사의 정을 잊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은 여기 한국에서 잘 정착해 열심히 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원을 나오고 바로 회사에 취직해 열심히 일하면서 삶의 기쁨을 찾았다.

내가 처음으로 취직한 회사는 재봉업체였다. 나는 북한에서도 30년 가까이 옷 만드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재봉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국출신 동료들과 비교해서도 기술이나 능력이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는 것이었는데도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었다.

당시 나의 집 배정이 한 달가량 늦어졌다. 그래서 천주교 하나센터에 머물면서 먼 거리를 출퇴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일한 대가로 월급이라는 것을 받고 보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야근이나 특근을 하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회사로부터 내가 탈북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큰돈이라고 생각했던 월급은 하루 일당 2만5천원 정도였고, 이 돈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비교해 많이 적은 액수였다. 내가 일했던 봉재업체는 소규모의 업체여서인지 책임자의 생각이 한국의 일반적인 기업이나 회사와 비교해 격이 많이 떨어졌다. 내가 탈북자라 한국의 실정을 제대로 모른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나에 대한 대우가 달랐던 것이다. 나는 잘 한다고 그렇게 최선을 다했건만 그 대가가 상처뿐이라는 생각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한국사회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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