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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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진정한 정착은 어떤 것일까

내 생애 봄날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3-11-05 18:04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다섯 살 난 딸아이와 함께 시작된 나의 방랑길은 꼭 십년동안 이어졌다. 참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들도 많았지만 잘 넘겼다. 생각해보면 여자의 몸으로 수없는 난관을 이겨낸 내가 신기하기까지 하다. 사실 그 시절엔 기쁨이니 행복이니 자유니 아늑한 집이니 하는 단어들은 잊고 살았다. 짐승보다 못한 삶에 부대끼느라 정신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목숨 걸고 다섯 개 나라의 국경을 넘어 한국의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없이 울면서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행복과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달간의 조사와 기초적인 정착교육을 마치고 나라에서 준 집에 이삿짐을 풀던 날, 나는 딸애와 조촐한 파티를 하며 “파이팅!”을 외쳤다. 이제 더는 쫒기지 않아도, 방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우리 둘은 그 밤, 잠을 설쳤다. 그리고 우리모녀는 서울 곳곳을 구경 다녔다. 지하철도 타보고 마트라 불리는 큰 대형 상점에도 가보고, 그땐 그 모든 것이 마냥 좋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정착금으로 받은 돈은 브로커 비용으로 다 넘어가고 내 손엔 겨우 70만 원 정도가 남았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딸아이를 기숙사가 있는, 탈북자 자녀들을 모아 교육시켜주는 대안학교로 보냈다. 그리고 무작정 취직을 했지만 겨우 3일을 버티고 그만두었다. 취직을 하려면 필수로 알아야 하는 컴퓨터도 다를 줄 모르고, 영어를 비롯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결국 아무 자격이 필요 없는 청소 일을 했다. 내가 일하던 곳은 한 문화센터였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이것저것 다양한 문화프로그람을 배우면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무엇인가 배우지 않으면 평생 미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 학원에 입학했다. 생전 처음 포토샵이니, 일러스트니, 쇼핑몰이니 하는 신기한 컴퓨터 세계에 빠져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하지만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졸업은 했으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나이가 많고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탈북자이다 보니 취직이 잘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식당일을 시작했다. 여기서도 낯선 음식이름과 생소한 말 때문에 엄청 애를 먹었다. 손님들이 음식을 주문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하기 일쑤였고 사람이 많을 땐 더 혼동되었다. 


사장님에게 욕도 참 많이 먹었고,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갔다. 조금씩 모은 돈은 고향의 가족들에게 송금하기도 했다. 산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 왔다. 결국 식당일에 지쳐버린 나는 몸마저 쇠약해져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한 달가량을 병과 씨름하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큰 대형 상점인 마트에 취직을 했다. 새로 개업을 하는 매장이어서 일이 엄청 많았다. 하루 열세시간까지도 일했다. 일은 고되었고 마음은 다시 약해졌다. 하지만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마음을 추스르고 오기로 버티기도 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열심히 살다보니 내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의 소개로 마침내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찾을 수가 있었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대학에도 진학했다. 


이 사회는 본인이 열심히 살다보면 길이 있고 알아봐 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무슨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하니라 성실함과 진실성으로 신뢰를 주는 것이 제일 빠른 정착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마음을 터놓으니 마음의 벽이라는 게 있었는가 싶게 소통이 편해졌다. 결국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사람들도 마음을 내어 준다는 것을 알았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남자와 새로운 가정도 꾸렸다. 남편은 힘들었던 나의 과거를 함께 아파해주는 따뜻한 사람이다. 그리고 학교기숙사에 있던 딸아이도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조금은 우울해 하던 딸아이도 금세 밝고 명랑한 성격을 되찾더니 공부도 나날이 발전한다. 무슨 동아리 활동이니, 학교 봉사단체 활동이니 하면서 매사가 적극적이고 활달하다. 딸아이의 변화를 보며 내 생애 이보다 더 행복한 날이 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 탈북자들의 진정한 정착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사업을 해 돈을 벌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이 모든 게 우리의 정착이다. 부지런히 시행착오를 겪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소통 하게 되고, 가정을 꾸려 안정된 삶을 찾는 것, 오늘을,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정착이다. 오늘도 내 정착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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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7천 탈북자들의 한국살이 이야기 “내 생애 봄날”, 오늘은 송시연 씨를 만났습니다.  


1. 송시연씨는 조선에서 남편이 사망한 후 혼자 아이를 데리고 사는게 너무 힘들어서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조선에 있을 때 한국에 대한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80년대에 임수경이 북한에 왔을 때, 한국이라는 나라가 굉장히 발전된 나라라는 생각을 했고, 또 대남 방송국에서 일했던 오빠를 통해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2. 시연씨는 중국에서 3년 동안 고생을 하고 한국에 왔는데요. 한국에서 내 집이 생겼다는 게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남의 집에 얹혀살다보니 내 집이 생겼다는 게 꿈만 같았다.)
   
3 한국에 와서 처음 일했던 곳은 방송을 시청하도록 가입을 권고하는 전화 센터였습니다. 전화로 방송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가입을 권해야 하는데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게 너무 어려웠습니다.
(메가헤르쯔라는 말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는데 도저히 전화  판매를 할 수가 없었다)


4. 청소일도 하고 식당 일도 해봤지만, 한국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려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자격증을 땄습니다.
(서로 말을 못 알아 들었다)


5 한국에 왔을 때 딸이 중학교에 갈 나이였는데요. 처음엔 탈북 청소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에 다니다가 고등학교 때 일반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대안학교에선 공부도 잘했는데 일반학교에 오니까 공부 하는 걸 힘들어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완만하게 적응을 잘했다.)


6. 시연씨는 4년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처음엔 마음이 가지 않았지만 딸이 더 좋아하는 통에 마음을 열게 됐다고 하는데요.


7. 한국 남자와 사는 건 어땠을까요.
(남편은 에둘러 말하는 스타일이고 자신은 직설적으로 말을 해서 갈등이 있기도 했다.)


8.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 남편과 아이 이렇게 가족들과 안정적인 생활이 좋다)


9 시연씨는 남편과 함께 직접 집을 지어서 평안하게 살고 싶은 소망이 있는데요. 그 소망 꼭 이루시길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공기 좋은 곳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CM1 리쌍_인생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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