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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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64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북조선의 식량문제가 어려워지면서 주민들, 특히 학생들의 도덕상태도 심각해져 갔습니다. 남학생이 녀학생을 공공연히 폭행하는가 하면, 도적질도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학생간부들이 학생들에게 술이나 담배, 돈을 가져오라고 종용하는 것은 거의 합법화되다시피 했고, 교수들조차 시험 때가 되면 학생들에게 술이나 담배를 요구했습니다. 뇌물을 받지 않는 교수는 기껏해야 1~2명 뿐 일 정도였습니다.







또 한번은 중앙당학교 선생이 찾아와 지금은 모든 기관과 기업소에서 물안지법칙(物顔指法則)이 지배한다고 하기에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물었더니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 국가의 기관이나 기업소들에서 담보가 없는 지령서를 남발하기 때문에 지령서만 갖고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뇌물을 줘야 하며, 다음으로는 안면이 큰 몫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뒤에야 겨우 국가 지령서의 효력이 나타난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물안지법칙 얘기도 마침내 옛말이 되었다. 일반대중 사이에서는 드러내 놓고 도덕을 비웃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1등 양심 있는 사람(1등 머저리)은 95년에 굶어죽고, 2등 양심 있는 사람(2등 머저리)은 96년에 굶어죽었는데 아마 3등 양심 있는 사람(3등 머저리)은 97년에 굶어죽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협작꾼들만 살아남게 된다.”는 말이 그것이다. 절도나 강도를 근절시킨다고 하면서 번번이 공개총살을 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었다.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방에서는 예사고, 평양의 시장에서도 사람고기를 파는 일이 적발되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한 준의사(의학대학 졸업생은 의사고, 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은 준의사다.)가 평양의 시장에서 돼지갈비를 사왔는데, 고기가 이상하여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틀림없는 사람 갈비여서 다음날 사회안전원을 데리고 나가 범인을 붙잡았다고 한다.



이렇듯 사태가 악화될수록 김정일은 더욱더 군사적 폭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새벽부터 밤늦도록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전쟁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광분했다. 나는 김정일이 드디어 무모한 전쟁에서 출로를 찾고 있음을 느꼈다.







형언할 수 없는 갈등



나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름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을 계속 추종한다는 것은 역사와 민족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과를 범하는 것임이 명백했다. 나는 철이 들 때부터 이제껏 남이 오해할 만한 행동은 더러 했지만 양심을 저버린 일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



김일성과 김정일과의 관계를 보더라도, 1980년대까지는 사실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충심으로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후 1990년대 들어서면서 나의 정신적 고민은 점점 커졌지만 내 입장으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으며,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살아남아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인민들을 무더기로 굶겨죽이면서도 전쟁준비에만 몰두하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으며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정일이 한국에 투항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김정일로서는 경제가 완전히 파탄나기 전에 전쟁을 일으키는 길밖에 없을 것 같았다. 또 대남사업 일꾼들의 말을 들어보면, 남한에 있는 지하당 조직의 힘은 막강하며, 게다가 운동권 학생들을 비롯하여 남한의 반체제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또 군부지도자들은 미군이 남아 있는 조건에서도 전쟁을 하면 북의 승산이 확고하다고 했다. 군부지도자들은 지금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면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일으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가져올 엄청난 민족적 비극에 대해 생각할수록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북한 통치자들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으며, 그들을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변했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내 앞에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는 공공연히 반김정일 기치를 내거는 것이었다. 이것은 언뜻 용감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개죽음을 당하는 무모한 길이었다.



다음은 계속 가면을 쓰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었다.



이 무렵의 재단사업(외화벌이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거액의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중앙당 부서로서 직접 외화벌이를 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체사상 대외선전을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하다 보니 국가보위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한번은 덕천탄광에서 화물차들이 타이어가 없어 운행을 못하고 있다고 해서 5만 불이 넘는 돈을 들여 타이어 200짝을 사다 주었다. 그리고 곤란을 겪고 있는 중앙당 일꾼들과 국가보위부 일꾼들의 생활을 적극 도와 주었다. 그러다 보니 당과 국가의 중요기관들이 우리와 긴밀한 연계를 맺으려고 경쟁적으로 달라붙었다. 나는 당의 지도사상을 담당한 비서로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비서로서 대외활동에 유리한 위치에 있고, 또 재단사업을 통해 귀중한 외화까지 적지 않게 벌게 되면서 내쪽의 영향력은 간단히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나로서는 그토록 유리한 지위는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내가 김정일을 반대하여 싸울 의향을 내비치면, 나의 모든 벗들은 김정일에게 계속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유리한 지위를 활용하여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해가면서 때를 기다리는 편이 좋다고 충고했다.



제3의 길로는 조금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양심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내 가족과 내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이 세 가지 길은 각각 장단점이 있어서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유리한지를 확정짓기 어려웠다. 내 성격으로는 제3의 길, 즉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김덕홍을 만나 정세를 설명해주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독약을 구해오도록 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64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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