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9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1995년 말경, 황장엽은 김덕홍을 통해 남조선 기업인들을 만나 금강산 관광문제를 협의했습니다. 남조선 측이 필요한 시설은 모두 건설할테니, 북조선측은 금강산 근처에 자유관광단지만 내놓으면 된다는 것이 남측 기업인들의 요구였습니다. 북조선은 아무런 투자 없이도 연간 10억 불 정도를 벌 수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나는 평양에 돌아와 김정일에게 북한의 경제는 관광업을 발전시키면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경제는 중병에 걸린 환자와 같아서 강한 주사를 맞지 않으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그런데 밑천 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그 주사약이 바로 금강산개발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김정일에게 한 마지막 건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른 비서들이 제기하지 못하는 것을 적지 않게 제기해왔다. 이를테면 조직부의 독무대가 되지 않도록 서로 견제하는 사업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 서기실을 5명 정도로 꾸리고 밑에서 올라오는 비준문건을 모두 함께 검토하여 중복을 피하게 해야 하며, 위에서 하달되는 명령과 지시도 서기실에서 함께 검토하여 아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의견을 달아 재보고하게 해야 한다는 것, 서기실에 실장제를 두지 말고 5명을 동격으로 하여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 중앙당 각 부서는 부서이기주의가 심하고 그에 따른 허위보고가 많다는 것, 경제분야에 도급제를 도입하여 일한 것만큼 분배해 주는 체계를 철저히 세워야 한다는 것 등 적지 않은 의견을 제기했으나, 김정일은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고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또 과오를 범한 간부들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재임용해야 한다고 제기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관광문제를 너무 강력하게 제기하자, 김정일은 시안을 작성해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인민무력부, 국가보위부, 관광총국의 간부들과 협의했다. 인민무력부는 이견이 없다고 했으며, 국가보위부는 관광버스의 운행과 안내를 전부 보위부 요원들이 담당하며, 관광객들에 대한 세뇌교육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의 안전에 지장이 없도록 시안을 만들어 보고했다. 통일전선부나 대외경제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관광문제를 여러 차례 제기해왔으나 올릴 때마다 기각당했는데, 이번에는 국제비서가 이론적으로 논거를 세워 보고했으니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희망을 걸었다. 그들은 그 결과가 알고 싶어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나 역시 성사 여부가 궁금했으나 김정일이 얘기를 해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일 측근자를 만나서, 그에게 관광개발 시안에 대해 물어봤다.



“왜 그런 걸 올렸습니까? 관광을 허용하는 것은 곧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우리 경제가 완전히 마비될 텐데,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란 말이오?”



“모르셨습니까? 벌써 완전 마비상태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려고 해도 식량이 문제고, 또 남조선을 점령한 다음이 걱정되어 위에서도(김정일) 지금 망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김정일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충고나 의견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고민은 더욱 커져 갔다. 그래서 암에 걸려 죽는 사람을 보면 나는 왜 암에도 걸리지 않는가 하고 원망했으며, 병으로 사망한 제자를 문상 가서는 내가 너무 오래 살아 부끄럽다고 말하곤 했다. 나 역시 대부분의 주민들처럼 때때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나 이놈의 세상, 빨리 끝장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었다.



1996년 2월, 인민들이 수없이 굶어죽는 가운데 김정일의 54회 생일을 경축하기 위해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주체사상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손님들의 숙소로는 대사관 영접부가 운영하는 시설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히 영접부의 숙소는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가까웠고, 부근에는 호텔이 없어 모양새도 괜찮았다.



나는 주체과학원에서 일하는 어린 접대원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16~17세의 고급중학 졸업생들로서 예술적 소양이 있는 처녀들이었다. 그녀들을 데려간 목적은 북한의 교육수준과 문화수준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학생들은 접대원으로 갔기 때문에 접대원복을 입고 노래도 불렀다. 학생들은 조선노래, 러시아노래, 서양노래 할 것 없이 모두 잘 어울려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대사관 직원들이 나를 찾아와 저 사람들이 정말 접대원들이 맞냐고 물어볼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모스크바의 여러 단체에서 공연을 요구해와, 결국 일곱 차례에 걸쳐 공연을 했다. 내가 이 학생들을 참가시킨 것은 주체철학을 딱딱하게 선전하지 않고 예술소조의 활동과 결부시켜야 한다는 다년간의 경험에 따른 것이었다. 접대원들의 체류비용은 국제주체재단에서 부담했으나, 기차로 오가고 대사관이 제공한 영접부 숙소를 이용하여 저렴하게 처리된 편이었다.



예술소조원들의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 토론회는 색다르게 진행되었다. 토론내용은 주로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을 비판하고 주체철학 원리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러시아 학자들 중에 특히 모스크바종합대학 학자들은 내가 그 대학출신이라 하여 나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환대했다. 나는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여러 차례 발언을 했다. 어디를 가든 교포들이 나를 둘러싸고 말하는 것이었다.



“주체철학의 원천지가 어디에 있는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아직도 물들어 있는 러시아 학자들을 각성시키는 통쾌한 연설을 해줘서 기쁘다.”



나로서는 평판이 너무 좋은 것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어쩌면 너무 큰 성공은 내가 스스로를 위해 환상을 조성했다는 비난으로 돌아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러시아 주재 대사나 당비서가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평양에 나쁜 보고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갖고 있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9부를 마칩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