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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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7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나라가 언제 파산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황장엽은 더 이상 김정일에게 의존해 주체사상 선전을 하려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주체사상 선전비용을 세계 각국에 있는 주체사상 조직들의 협조를 통해 자력으로 벌어보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김정일은 외화벌이가 쉽지 않다며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면서도 국가보위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비준해주었습니다.





나는 이 사업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내게 직속되어 있는 비밀부서인 자료연구실에 5명 규모의 ‘재단담당 분실’을 만들어 김덕홍을 자료연구실 부실장의 한 사람으로 임명했다. 김덕홍의 자리는 월급으로 보면 정무원 부부장급과 비슷했으나, 당 간부로서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신분이면 어느 기관이나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덕홍은 내가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교무부를 책임진 채 대학실무를 총괄했다. 그는 사회안전부에 근무한 적도 있어 사회안전부 계통 사람들이나 보위부, 무력부 쪽 사람들과도 관계가 깊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대학관리를 위해서도 중용했는데, 사회안전부나 보위부와 협조할 일이 있으면 그를 앞세워 일을 해결했다. 또 내가 중앙당으로 돌아갔을 때는 중앙당 지도원으로 불렀었다.



덕홍이 맡은 사업 중에서 평성의 주체과학원 보조청사 건립사업은 다행히 그가 맡은 덕에 아무런 잡음 없이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었다. 내게는 서기가 두 명이나 있었으나, 나는 덕홍을 가장 믿었다. 나는 서기들에게 부탁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서슴없이 덕홍에게 부탁하곤 했다. 나와 덕홍이 그토록 친했던 만큼, 자연스레 아들 경모도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덕홍은 재단사업을 하며 해외에 나가 여러 지역의 교포들을 만나고 남한의 기업가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더욱더 내 사상의 정당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적 발전은 나도 놀랄 정도로 빨랐다.



1994년에도 식량이 모자라 인민들이 굶주렸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었다는 소문은 없었다. 그러나 1995년에 들어서자 사정은 급속도로 달라졌다. 평안북도 지방에 수재가 난 이후로 식량난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도처에서 굶어죽은 사람들이 날만 새면 무더기로 나왔으며, 식량을 구하기 위한 살인강도 역시 부쩍 늘어났다.



오죽하면 당 간부들이 밤중에 산길을 가다가 군인들에게 제지당해 차량이 파손되고 가지고 있던 것들을 약탈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겠는가. 그런 소식을 들은 김덕홍은 해외에서 힘이 닿는 데까지 밀가루를 사서 보내기 시작했다. 그 양이 어떤 때는 100톤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밀가루를 우선 주체과학원 연구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보위부에도 풀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일요일이어서 집에 들어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면서 점심을 챙겨가려고 주방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내가 아침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아내는 곧잘 그렇게 아침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무심결에 밥상을 봤더니 반찬이 된장찌개 한 가지였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아내의 점심밥곽(도시락)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밥이 반쯤 담겨 있고 반찬 그릇에는 짠지만 몇 조각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내가 직장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손주들 수발하고 채소밭도 가꾸는 등 바삐 일하는 것을 알고 있어, 순간 역정을 냈다.



“왜 이렇게 밥을 조금 싸가지고 나가? 이렇게 먹고 어떻게 일을 한단 말이오?”



“아이고, 그런 말 마세요. 이것도 가져가면 혼자 먹기가 죄스러워요. 모두 다 풀만 싸가지고 오는 걸요.”



나는 앞이 캄캄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아내의 말이 이어졌다.



“주체과학원 사람들은 걱정 없이 산다는 소문이 있어요. 밀가루를 우리 직장 쪽에 좀 나눠주면 안 되나요?”



“그렇게 하지. 우선 한 사람당 20㎏씩 주겠어. 하지만 거저 줄 수는 없어.”



“출판사에서 녹음 카세트를 수천 개 갖고 있으니까 바꾸는 방법을 찾아봐 주세요.”



그렇게 하여 나는 밀가루와 카세트를 맞바꾸었다. 아내의 직장에서는 어찌나 고마워하는지 내가 오히려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때나마 아내의 직장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했지만, 수많은 인민들을 구할 길은 참으로 막막했다. 이래서 가난은 나랏님도 구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사태가 이러한데도 김정일은 인민들의 식량난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직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궁전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자신의 우상화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었다. 나는 허탈하다 못해 차츰 분노가 치밀었다.



그해의 식량 사정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데도 김정일은 그런 사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재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밀 경찰망을 더욱 강화하고 조금이라도 반체제적인 요소가 나타나면 주동자를 색출해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으로 재판도 없이 즉결 총살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7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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