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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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5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1994년 7월 8일, 황장엽은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꾸바 하바나 공항에서 들었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평양으로 돌아와 보니 아내도 아이들도 슬픔에 잠겨 울고 있었습니다. 온 나라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장엽은 눈물이 나질 않았습니다. 원래 눈물이 없기도 했지만 슬픈 감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혼자서 멀쩡한 눈으로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려야했습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김일성은 분명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 잘해주었고, 또 한편으로는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식 정치를 더욱 개악(改惡)함으로써 사회발전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이 너무도 커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의 죽음을 마음속 깊이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개인숭배로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극도로 마비시켜 전 인민이 땅을 치며 울도록 만든 그의 행적이 더욱 미워지는 것이었다. 북한주민을 자주의식이 없는 꼭두각시로 만든 걸 생각하면 눈물은커녕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7월 20일 오전 김일성의 장례식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있는데 김정일에게 전화가 왔다.



“황 비서, 이제 새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 새 시대에 맞게 일을 잘해 나갑시다.”



나는 조금 의아해했다. 그에게는 나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많은데도 굳이 나에게 그런 전화를 먼저 걸었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이따금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나에게 의견을 묻는 경우는 많았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그를 추켜세워 주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비서들의 좌상인 황 비서의 의견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언제인지는 기억이 없지만 김경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아첨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심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오빠는 고독해 합니다.”



나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한 옛일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변했는데 이제와서 어떻게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7월 20일에 김정일이 전화로 말한 내용을 이론적으로 품위있게 정리하여 그의 이름으로 비준을 받아 정식문건으로 채택했다. 나로서는 김일성이 죽었으니 김정일의 마음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김정일은 권력승계 문제를 묘하게 질질 끌어왔다. 인민들은 김일성이 죽고 나자 더 열심히 일했다. 한번은 황해남도에서 농사가 잘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간부들과 함께 나가 보니, 농사는 잘되었지만 사는 게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농민들의 부엌에는 밥 먹을 그릇과 심지어 수저도 모자랄 정도였다.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 보시오.”



농민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없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가슴이 아팠다.



당은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는 문제와 김일성 동상에 꽃을 바치는 문제로 떠들썩할 뿐,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누구 한 사람 공식적으로 제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밤에는 간부들이 김일성 동상을 교대로 지켜야 했다. 나는 감기에 걸린 상태였지만 배당이 되어 있어 밤중에 한 시간을 겨우 서고 들어왔다. 어떤 간부들은 밤을 꼬박 새우면서 충성심을 과시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런 일을 당이 낱낱이 조사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하고, 본부당 회의에서 공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보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나와 보지 못한 사람들이 사정에 관계없이 처벌을 받은 사실이었다. 주체과학원의 한 유능한 박사는 김일성이 죽었는데도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었다는 구실로 철직 당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울기 경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한두 번이라면 몰라도 눈물이 계속 나올 리 없었다. 손수건을 눈에 대고 우는 시늉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계속해서 김일성의 시신을 참배하거나 동상에 꽃을 바쳐야 했다. 물론 그중에는 진짜로 우는 사람도 있었다. 당이 선전하는 것을 모조리 믿어온 사람들이었다.



김일성이 죽은 7월 8일을 기념하여 매월 8일이면 모든 직장에서, 직장이 없는 사람들은 온가족을 이끌고 김일성 동상에 꽃을 바치러 나섰다. 더구나 죽은 지 백 일이 된 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길거리가 막힐 지경이었다. 외국출장을 갈 때도 먼저 동상에 꽃부터 바치고, 외국사람이 오면 비행장에서 동상이 있는 곳으로 곧장 데려와 꽃을 올리게 했다.



내 눈에는 이 모든 짓거리들이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쳐도 이만저만 미친 것이 아니었다. 인민들은 끼니를 굶고 있는데 언제까지 동상에 꽃을 바치는 놀음을 계속해야 성이 찰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이제는 김일성보다 후계자를 더 내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그 누구도 이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때부터 김정일에게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는 칭호 대신 ‘위대한 장군님’이라는 칭호를 더 많이 붙이게 되었다. 당내에서도 대남부서에서는 ‘최고사령관’이라는 존칭을 공식문건에까지 쓰기 시작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5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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