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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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2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황장엽은 주체사상과 종교와의 관계설정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철저히 배격했지만, 황장엽은 종교나 주체사상이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본질로 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서로 협조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황장엽은 때로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해도 시작만이라도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1993년 말경 김정일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국제비서를 다시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기쁘기보다는 가슴이 철렁했는데, 처음 국제비서가 될 때보다도 심적인 부담이 더 컸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야릇한 호기심도 마음 한구석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이미 권력의 중심부가 얼마나 살벌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던 터였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저는 목이 나빠서 수령님을 모시기 곤란합니다.”



그러자 김정일이 웃으면서 말했다.



“목이 쉬면 수령님 귀에 가까이 대고 크게 말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국제부가 이제는 외교부를 지도 통제하지 않고 세계 각국 당들과의 교류만을 사업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당들과의 사업이 곧 사상이론 사업이기 때문에 사상이론 전문가가 비서를 맡는 게 옳고, 따라서 주체사상연구소를 국제부에 합병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당시 국제비서로 있던 허담이 건강악화로 인해 비서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허담은 형식상 최고인민회의의 대외사업을 맡고 있었으나, 신병치료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 김용순이 통일전선담당비서로 간 뒤로 기존에 과학교육비서로 있던 최태복이 1년 동안 국제비서를 맡았는데, 최가 주체사상을 몰라 국제비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한편 김용순이 통일전선비서로 가면서 김경희도 경공업부장으로 옮겨가, 나로서는 경모의 혼인문제 이후로 멀어진 김경희와 업무상 마주치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내가 국제비서를 맡는다고 해도 김경희를 직접 상대할 일은 드물었다. 김일성 부자로부터의 마음은 자꾸만 멀어져 갔으나, 북한을 살려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김정일은 경제 사정이 악화되는 가운데 전쟁준비에 더욱 힘을 쏟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이른바 고자세 외교정책을 견지했다. 그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러시아가 수정주의를 표방하다가 망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더구나 중국과 베트남까지 비방함으로써 그들 나라와의 관계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베트남과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고 왕래가 잦아지면서 김정일의 신경질은 극에 달했다. 심지어 조선노동당대표단의 경우에는 외국에서 베트남 당대표들과 만나도 악수조차 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들은 베트남에 나날이 투자를 확대하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도 비췄듯이 북한의 대외정책을 어느 정도 바로잡아 보려고 국제비서를 수락했다. 물론 북에서는 김정일의 제의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국제부로 돌아오자마자 국제정세의 분석을 기초로 해서 당 외교의 기본방향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특히 중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가까운 나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 들어 있었다. 김정일은 나의 제의를 지지해 주었다.



김정일의 비준을 받은 나는 중국의 광저우와 주하이 같은 개방지역을 방문하면서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의 성과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장쩌민 주석과도 두 번째로 만나 뜻깊은 담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그가 중국과 같은 대국을 능히 이끌어나갈 수 있는 큰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중국에 대한 김정일의 질투심에 영합한 외교부 간부들은 중국이 자본주의로 간다느니 민족이기주의로 간다느니 하면서 대만과의 교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들은 ‘대만 주패장(카드)’이라고 하면서 대만과의 연계를 중국을 견제하는 무기로 활용하려 했다.



나는 대만이 절대로 중국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대만과의 교류에 반대했다. 김정일은 중국의 개방도시들인 선전, 주하이 등을 북한주민들이 참관하지 못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만리장성의 견학까지 금지했다. 그래서 북한사람들은 중국을 방문해도 만리장성에 가보지 못했다. 왜 그런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싹틀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김일성 부자는 베트남을 괘씸하고 의리가 없다면서 계속 헐뜯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잘못은 베트남에 있는 게 아니라 북한 측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김정일의 중국에 대한 반감을 오히려 베트남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이용했다. 즉 북한과 베트남은 중국 대국주의를 반대하는 데는 입장을 같이한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유리했다. 또 라오스, 캄보디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베트남과는 친하게 지내야 했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된 조건에서 우리가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서 베트남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방문하여 관계유지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내가 방문하겠다고 했더니 김정일은 베트남과 라오스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베트남에는 나와 안면이 있던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개혁 개방정책을 적극 지지해 주고 두 나라 당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도모이 총서기의 북한 방문을 적극 추진하여 그 길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도모이 총서기의 북한 방문은 불발로 끝났다.



라오스를 방문하면서 나는 지난 시기에 김일성이 지리적으로 먼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는 한편 그들 나라에 대한 소규모 원조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여보려 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라오스를 지원했더라면 지금같이 어려운 형편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북한으로서는 이미 라오스를 도와줄 만한 힘이 없었다. 오히려 북한사람들이 들어가 순진한 라오스 사람들을 속이며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2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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