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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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0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황장엽의 아들 경모와 장성택의 누이의 딸이 서로 눈이 맞아 결합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세력들은 황장엽이 장성택을 등에 업고 힘이 커질까봐 결혼을 반대합니다. 김정숙과 김경희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애비구실을 하고 싶었던 황장엽은 결국 김정일을 찾아갔고, 결혼은 성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약이 오른 김경희는 사이좋게 지내던 황장엽의 아내에게 절교를 선언했고, 김경희가 관계를 끊자 황장엽 반대파들은 무척 좋아했습니다.





1992년은 김일성의 80회 생일과 김정일의 50회 생일이 낀 해였다. 김일성은 이미 예전의 김일성이 아니었다. 원기도 사라지고 어떡하면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성공적으로 넘겨줄까 하는 문제만 생각하는 노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 김정일에게 노골적으로 아첨하는 것도 눈에 자주 띄고, 또 소문으로도 들려왔다.



한 예로 누구도 아닌 자기 아들의 50회 생일을 칭송하는 송시를 썼는가 하며, 심지어 이를 비석에 새겨 백두산 소백수골 안에 꾸며 놓은 김정일 생가 근처에 세워두기까지 했다. 나는 어느 날 아침 김일성의 송시라는 것을 팩스로 받아보고는 아연실색했다. 나는 언제나 역사는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김일성이 김정일의 생가를 꾸미고 송시를 쓴 것은 그의 일생에서 아마도 최대의 과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형편없는 속물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될 것이다.



김정일이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라’라는 이름으로 유년기를 보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며, 김경희가 내게 준 소련판 지도책에도 유라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다. 그런데 굳이 그런 사실을 속이면서 백두산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김정일이 태어난 백두산의 밀영을 찾아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백두산 일대를 뒤졌지만 애초에 없던 밀영지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찾아야겠다며 돌아다니다가 경치도 적당하고 위치도 그럴듯한 곳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명명했다.



당 역사연구소는 구호나무도 준비하고 큰 바위에다 ‘정일봉’이라고 써서 산정상에 올려붙였다. 그리고 예술인들은 ‘정일봉’이라는 노래를 지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칭송하는 시를 써서 돌렸던 것이다. 나는 남부끄럽고 한편으로 김일성이 애처롭기도 하여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일성은 지난 1992년 무렵에 이른바 회고록을 집필하는 데 큰 기대를 걸었다. 나는 형식상으로나마 당 역사연구소를 담당하는 비서로서 속으로 제발 한두 권만 내고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의 얘기지만, 그 일로 한몫 보려는 사람들은 김일성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 회고록을 내자고 주장하며 나섰다. 나는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며 반대했다. 처음에는 김정일도 내 말을 듣는 것 같았으나 회고록 속편이 만들어지자 아주 흡족해했다.



아무리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도 역사는 반드시 진실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토록 뻔한 이치를 어째서 그렇게도 모르는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찮은 경력도 속이는 자들이 어떻게 인민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인가. 김일성 부자는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몰랐으며, 오직 이기주의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속물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1992년의 그 추태를 보면서 내 마음은 김일성 부자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쓸데없는 것에 시간과 정열을 허비하기보다는 두 가지만을 해야겠다고 작정했다. 하나는 시간을 쪼개어 어떻게든 내가 개척한 인간중심의 사상을 정리해서 후대에게 남겨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사상 국제세미나를 이용하여 주체철학을 좀더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작정한 나는 예전보다 주체과학원에 더 자주 나가 학자들과 이론토론회를 열었다. 왜냐하며 김정일이 내가 김일성 부자의 글을 쓰면서 강연을 하고 다니면 자신들 명의로 글이 발표되기도 전에 새 사상이 세상에 나간다는 이유로 이론강연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토론회는 막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주체과학원에서 토론회를 열도록 하고는 토론회에 참가해 발언하는 형식을 취했다.



나는 일종의 안전장치로서 토론제목은 늘 김정일의 노작들 중에서 정하여 ‘김정일 노작 토론회’ 형식을 취했다. 한편으로는 외국의 학자들과도 토론회를 열어 내 사상을 서서히 조심스럽게 전파했다.



토론회가 아닌 외국인과의 면담은 반드시 면담록 정리과에서 녹음을 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론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대화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학술토론회라고 하면 녹음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학술토론회를 이용하여 북의 사정을 외국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알려진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김일성의 80회 생일이 든 1992년 4월로 접어들었다. 생일을 경축하기 위해 주체사상 국제토론회가 도쿄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그래서 북한의 학자들이 평양에서 나고야까지 전세기를 타고 토론회에 대거 참가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북한은 외국학자들을 초청하여 전세기 편으로 평양에 돌아왔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외국학자들을 초청한 이유는 김일성의 80회 생일 기념행사에 그들을 참가시키기 위해서였다. 인민들에게 외국에서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수령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음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여러 면에서 크게 발전한 일본에서는 주체사상의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 학자들과 깊이 토론할 기회를 가질 수 없어, 토론회가 끝난 다음 한 열흘쯤 더 체류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일본의 학자들과 진지하게 토론하면 적지 않게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뜻처럼 안 되었다. 생일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0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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