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47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김정일은 모든 분야에서 당의 독재를 강화했습니다. 그에 따라 경제관리는 경제를 모르는 당 일꾼들이 좌지우지했으며, 그 결과 북조선의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신격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치면서 경제를 더욱 가파른 절벽으로 몰아갔습니다.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고 웽그리아가 남조선과 국교를 맞는 등 세상은 변하고 있었지만, 김일성부자는 세상의 흐름에 거꾸로 나아갑니다.





당시의 상황도 그랬지만, 가만히 보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일이 잘 안 될수록 상대편을 비방하면서 위안을 찾는 것 같았다. 김일성은 중국에 대해 계속 수정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면서 비방했으며, 덩샤오핑에 대해서도 온갖 비난을 다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덩샤오핑이야말로 소련식 마르크스주의의 잘못된 길에서 중국을 구원한 위인이라고 평가했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특히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하루는 김일성 부자가 중국을 반대하는 글을 조총련에서 발간하는 출판물에 무기명으로 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극비리에 전해왔다.



나는 반대의견을 전했다. 중국의 태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만나서 따지든 욕을 퍼붓든 해야 하며, 또 조총련의 발간물을 이용한다고 해도 중국사람들이 모를 리 없을 뿐 아니라 글로 남기면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는 뜻을 강조했다. 만약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이미 발표된 글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물이 되어, 장차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한 국면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점도 함께 말해 주었다. 내 의견을 받아들였는지, 김정일은 그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붕괴와 회의(懷疑)



소련사회의 붕괴로 북한이 받은 충격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그러나 김정일은 놀란 가슴을 애써 숨기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조선민족 제일주의’ 등의 구호를 내걸고 조선식 사회주의의 필승불패를 선전하는 글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 글들은 나의 지도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선전부 ‘216호실’과 조직부 교시편찬과 직원들이 쓴 것이었다. 원래는 그 두 곳에서 씌어진 글들도 나의 검토를 받아야 했으나, 너무 질이 낮아 잘 보아주지 않았더니 그들이 김정일에게 직접 올려 비준을 받은 모양이었다.



대남부서에서도 난리가 났다. 남한의 운동권 학생들이 소련의 붕괴로 혼란에 빠져 있고, 더구나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와 같은 글로써는 그들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나는 문서정리실 요원들을 지도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노선」이라는 글을 써서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대남부서에서는 이 글이 남한의 운동권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나중에 알려왔다. 그리하여 나는 또 남한의 철없는 운동권 학생들을 기만하는 죄과를 하나 더 범하게 되었다.



세계사의 흐름이 바뀌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반대하는 자들의 가소로운 책동은 그런 흐름을 읽지 못한 채 계속되었다. 김정일은 어느 날 초대소에 있던 나에게(봉투에 내 이름을 친필로 쓴) 극비문서를 보내 주었다.



봉투 안에는 내가 수령관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글을 누가 썼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그 같은 자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는데, 김정일은 그 글을 읽고 서명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문서는 법적인 문서였다.



며칠 후 김정일과 통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도대체 주체사상을 시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유치한 놈들이 함부로 이따위 글을 써서 지도자께 올리다니, 정말 무엄하기 짝이 없습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더니 김정일이 크게 웃고 말았다. 원래 김정일의 친필서명이 된 문건은 영구보존 문건으로서 국고에 보관하도록 총무부에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서는 내가 계속 가지고 있다가 망명을 하면서 금고 안에 두고 왔다.



소동이 가라앉자, 나는 의암초대소에서 원고집필을 지도하면서 시간을 내어 외국의 출판물들을 읽었다. 나는 지도사상 이론담당비서로서 외국서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내 서고에는 외국서적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특히 미국의 학자들이 쓴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초대소에서는 새벽 4~5시에 기상해서 낮 12시까지 일을 계속하여 일단 하루 작업량을 끝냈다. 나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아침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 점심시간까지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일하는 시간이 젊은이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침을 약간 한 후에는 주로 가벼운 일을 했다. 대체로 주체과학원에 나가 외국에서 온 학자를 만나거나 과학원 학자들과 개별담화에 임했다. 나는 글을 매끄럽고 논리적으로 잘 다듬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쓸 일이 생기면 내가 일단 기본사상을 얘기해 주고 아래에서 초안을 만들도록 했다. 초안이 만들어지면 모두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쳐나가게 하든가, 시간이 없을 때는 내가 글의 틀을 직접 짜주고 초안을 만들게 하는 방식을 썼다.



독일의 통일도 소련의 붕괴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부자는 이 두 가지의 엄중한 경고를 보면서도 역사에 더욱 역행하는 길로 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북한의 장래가 뻔히 내다보여, 내 고민은 갈수록 커졌다. 나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북한의 현실을 뒤집어 선전하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내가 보기에 유일하게 남은 희망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중국을 따라 개혁 개방으로 나가는 것이었으나 그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도 내심으로는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북한을 방문하고 간 인사들도 그저 많은 것을 배워간다는 투의 의례적인 말만 할 뿐이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47부를 마칩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