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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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46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황장엽은 한 체제의 몰락은 대체로 외부적인 충격보다 내부적인 모순에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조선정권의 몰락도 바로 그 내부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김정일의 무능력과 정권에 대한 야욕, 황장엽은 그 점을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1970년대, 경제학의 초보적인 이론마저 무시한 채 무리하게 벌였던 ‘70일 전투’, 결국 국가 경제발전에 치명적인 차질을 초래했지만 김정일은 자기 공로를 과장하고 선전하는 일에만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나라경제를 파탄시킨 김정일의 작은 사례에 불과합니다.





김정일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를 가르친 교수의 말에 따르면,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책은 원래 참을성이 없는데다 탐구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런 만큼 경제에 대해 실제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김정일은 경제의 경우에도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속임수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설비를 보수하고 생산을 정상화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권력기관을 장악하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김정일이 모든 분야에서 당의 독재를 강화함에 따라 경제관리는 경제를 모르는 당 일꾼들이 좌지우지했으며, 그 결과 북한의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의 신격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쳐, 경제를 더욱 가파른 절벽으로 몰아갔다.



김정일은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린 것에 자극을 받은 탓인지, 방대한 규모의 체육시설을 건설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그는 평양에서도 올림픽을 연다고 떠들면서 국력수준에 어울리지도 않은 많은 체육시설들을 자신의 기분대로 착공했다. 나아가 한술 더 떠 평양을 세계 1등급의 현대도시로 가꾸겠다며 광복거리, 통일거리를 건설하라고 인민들을 몰아붙였다.



또 김일성의 환상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쓸데없는 서해갑문(남포갑문이라고도 하며 8km에 이른다.)을 건설하는 데 막대한 자원을 낭비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댐 건설에 엄청난 자재와 노력을 투입했다. 공사가 한창일 때는 인민군이 물 속에서도 작업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금강산댐에서 80만㎾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겨우 40만㎾에 그친다고 했다. 1차 공사가 끝났을 때 현장을 가보았더니, 그때까지 투입된 자금과 자재만 해도 서해갑문 건설에 비해 2배나 넘게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겨우 5만㎾의 전력을 생산하는 데 머물고 있었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북한으로서는 아마도 마지막의 호화로운 행사로 기억될 것이다. 이 무렵 김일성은 그나마 왕년의 원기와 의지는 사라지고 줄곧 아들인 김정일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한 형편이었다.



나를 잘 아는 부총리들은 내가 국제비서이고 또 이론전문가로서 융통성이 있어 자신들을 일러바칠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보았던지, 함께 출장을 갈 때면 자주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들은 은밀한 얘기를 털어놓으면서 북한경제가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멎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줄곧 경제가 발전하고 있다는 허위선전만 일삼았으며, 또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조직부의 교조주의자들은 경제 실무자들의 걱정하는 태도를 패배주의라고 비난하면서 들볶기만 했다. 중국의 전문가들도 북한에 와보고는 정치적인 선전만 우선시하고 있다고 나에게 조용히 말해 줄 정도였다.



인민들을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했지만 참으로 난감했다. 주관적 환상에 들떠 있는 김일성에게 내가 들은 얘기들을 전해 줄 방법이 없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도 아니었다. 정치적 권력만능주의자인 김정일에게 얘기해본다는 것은 더더욱 소용없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이미 그런 말을 건네기가 곤란한 분위기였다. 중앙당 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서로 눈치만 살피는 싸늘한 형국이었다.



김환은 당 중앙위원회 경제담당비서로서 정치국 위원이었는데, 당시 중국에서 실시 중이던 가족도급제가 장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과학원 연구사의 행동을 제때에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철직되어 정무원 부장으로 강직되었다. 또 ‘216호실’을 담당했던 선전부 부부장은 그동안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왔으나, 김환과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본부당 회의에서 호되게 비판받은 뒤 선전부에는 소속만 걸어둔 채 김일성 부자의 우상화를 위한 영화문헌 편집실로 쫓겨났다. 이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서 개혁 개방에 동조하는 말을 조금이라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동유럽의 사회주의 나라 가운데 헝가리가 맨 먼저 남한과 국교를 맺었다. 그러자 외교부장은 당장 외교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당시 의암초대소에서 집필사업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김정일이 전화로 내 의견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문제지 이제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이 헝가리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외교를 단절한다면 회복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나는 또 세계는 변하고 있으며, 그 변화를 어느 한 나라가 억지로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러자 다음날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외교부장과 내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는 협의 끝에 결국 중간을 택하여 대사를 소환하는 한편 대리 대사를 두기로 결정했다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김정일은 외교부에 헝가리를 비난하는 글을 쓰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나에게는 외교부 사람들의 이론수준이 낮으니 그쪽에 대해 지도를 좀 해달라고 했다. 외교부에는 글을 잘 쓰기로 소문난 부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정말이지 글을 빨리 썼다. 그가 초고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하룻밤에 원고지 100매 정도를 매끈하게 써낼 정도로 문장력은 있었으나,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어 깊은 사상이 담긴 글을 쓰지는 못했다.



그는 김정일의 술 파티의 고정 멤버였는데, 그 전날 술이라도 마셨는지 도무지 맥을 못추었다. 그 바람에 나는 마음에도 없는 글을 울며 겨자먹기로 써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46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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