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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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7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수정주의와 국제종파주의로 서로를 몰아붙였던 쏘련과 중국은 회의가 막 결렬되려던 찰나에 화해를 성립합니다. 레닌의 초상화 앞에서 서로를 비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중국을 지지했던 조선로동당은 중국이 조,중간의 약속을 저버린 채 일방적으로 소련과 화해한 것에 불만을 가졌으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흐루시초프가 1시간 동안 연설을 했는데, 연설내용은 전날과 180도 달랐다. 저녁에는 흐루시초프가 연회를 차렸는데, 알바니아대표단을 비롯한 몇몇 나라 대표단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돌아갔다.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 모두 근본적인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겉으로는 타협하는 척했으나 과도기에 대한 입장과 노선은 합의하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고 말았다.



흐루시초프는 점잖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걸 자랑하면서 농담과 거친 쌍소리를 해대며 사람들을 웃기거나 놀라게 했다.



중소 논쟁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이다. 11월 7일, 10월 혁명기념일에 군중시위를 보기 위해 각국 대표단이 레닌 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덩샤오핑이 지팡이를 짚은 채 다리를 절며 뒤처졌다. 그러자 앞서 가던 흐루시초프가 덩샤오핑을 돌아다 보면서 먼저 가라고 권했는데, 덩샤오핑은 내가 어떻게 감히 당신 앞을 걸어갈 수 있겠느냐면서 거절했다. 흐루시초프가 다시 권하면서 말했다.



“괜찮으니 앞서 가시오. 나는 당신을 뒤에 두고서는 안심이 안 되어 도저히 가지 못하겠소. 회의에서 나를 몰아붙였는데 오늘은 뒤에 오다가 그 지팡이로 후려칠 것 같아서요.”



이에 같이 가던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중소 간에 화의가 성립되고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겉과는 달리 두 나라는 여전히 소리 없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중소 간의 논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들은 물질적 욕망이나 권력욕이 없고 오직 공산주의 이념만을 위하여 싸우는 참다운 혁명가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중국과 소련이 서로 편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권력욕이 강하며 권력을 위해서는 사상이나 이론의 정당성에 관계 없이 그것을 저들의 이익에 맞게 왜곡하여 해설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정치지도자들이라는 자들도 이론수준은 그리 높지 않으면서 오로지 권모술수에만 능하다는 것 또한 알았다. 나는 그러면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는 명백한 과학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마르크스나 레닌의 학설을 교조주의적으로 대해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하여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김일을 수행하면서 그가 수양을 많이 쌓은 혁명가라는 걸 알았다. 김일은 김일성에게 무한히 충직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공산당을 예로 들면서 김일성의 독재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권위는 대단하지만 그래도 중국공산당에서는 마오쩌둥의 잘못에 대해 비판도 하거든.”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 비판과 함께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은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주체사상의 싹



1960년 나는 또 다시 최용건을 수행하여 중국의 동북지방(만주)을 방문했는데, 저우언라이 총리와 담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저우 총리는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다른 이들은 모두 오침을 하는데도 계속 집무하면서 나를 불러 조선역사에 대해 듣고는 했다. 헤어질 때 그는 나에게 조선말로 된 것이라도 좋으니 조선역사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귀국하여 책을 보내 주었다.



저우 총리는 내가 보기에 매우 총명하고 성실하며 기지가 있었다. 연회 때는 우리 측 단장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주더(朱德), 덩샤오핑 등 중국의 권력실세들이 자리 잡았다. 늘 사람을 즐겁게 하고 웃기는 사람은 저우 총리였다. 그는 공장지배인이 손님들에게 공장 자랑을 하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판을 했는데, 지배인들은 저우 총리의 지적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중국의 동북지방을 방문하는 동안 나는 최용건으로부터 항일무장투쟁 과정에 대해 많이 들었다. 중국사람들이 최용건의 투쟁경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만큼, 김일성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제기될 때는 최용건을 파견한 적이 많았다.



1961년이 되자 서기들은 9월로 예정된 제4차 당대회 준비로 바빠졌다. 나는 1959년부터 서기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2년이 지나서도 글쓰는 재주가 늘지 않고 여전했다. 또 대부분 경제와 관련된 글이어서 경제전문가들이 많이 맡았고, 나는 연회연설이나 군중대회용을 준비하는 데 그쳤다. 서기들은 자기에게 떨어진 일감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불리했다.



그럴수록 나는 철학이론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나의 사고와 현실주의적인 김일성의 사고방식 간에 점점 간격이 벌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제4차 당대회 보고에서 나는 당의 건설문제를 책임지고 집필했는데, 그 후부터 자연히 당의 건설문제는 내가 전담하게 되었다. 나는 창조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으나 글을 다듬는 수준에서는 다른 서기들을 못따라갔다. 특히 실장은 경제전문가답게 글을 논리적으로 짜임새 있게 다듬는 데 나보다 월등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며, 문투도 내가 싫어하는 스탈린식 문투를 좋아했다. 나는 그때까지 『자본론』은 1권만 읽었지 2, 3권은 못 읽어봤는데, 그들이 『자본론』에 대해 하도 떠들어대는 바람에 억지로 2, 3권을 읽었다. 그러나 지적인 소득은 별로 없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7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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