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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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8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1995년, 도처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한 살인강도도 부쩍 늘어났고 심지어 군인들까지 약탈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김정일은 인민들의 식량난에 대해 별다른 조취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궁전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 또 자신의 우상화를 높이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김정일의 이런 모습에 황장엽은 허탈하다 못해 차츰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해의 식량 사정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데도 김정일은 그런 사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재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밀 경찰망을 더욱 강화하고 조금이라도 반체제적인 요소가 나타나면 주동자를 색출해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으로 재판도 없이 즉결 총살했다. 한번은 중앙당 내의 보위관계를 관리하는 요원이 나를 조용히 찾아와 말하기를 “사무실에는 도청장치가 되어 있고, 카메라가 설치되어 모니터로 샅샅이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모두 기록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반김정일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학생들이 대부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채 결국 총살을 당하러 가는 줄 알면서도 뒤에 남은 학생들에게 “저 먼저 갑니다.”라고 덤덤히 인사를 남기고는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그런 광경을 매일 접하다 보니 도저히 술을 안 마시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끼리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자이며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황 비서동지만은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갖고 있던 약간의 외화를 주며 동료들과 술이라도 마시라고 했다. 그는 한사코 사양하다가 그 돈을 받아갔다.



1995년 8월 15일은 해방 50돌이 되는 날이었다. 기념행사를 함흥에서 열기로 하여 간부들이 모두 기차로 떠나고, 나와 양형섭만 남아 남한에서 오는 학생대표를 마중하는 환영대회에 참가했다. 우리는 그 행사를 마치고 나서 밤차로 함흥으로 갈 예정이었다.



나는 남한에서 온 두 학생을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내 양심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과 악수를 하면서도 ‘이 어린 학생들을 속이고 있구나.’하는 죄책감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한 남한의 청년학생들이 북한의 실정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차고 자유가 없어 감옥과 같은 북한을 굳이 찾아올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청년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그들이 이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사회주의와는 인연이 먼 전체주의와 봉건주의가 결합된 현대판 봉건사회인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나는 독일에 있는 송두율 교수와 남한의 소설가 황석영과도 만난 적이 있다. 송두율 교수에게는 주체사상의 진수를 알려주려고 시도했으나, 북한의 실정을 있는 그대로 말해 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사실 북한당국이 그를 신뢰하는 차원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들의 나쁜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그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을까? 김용순은 나에게 송두율 교수를 교양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송두율은 주겠다는 것인지 달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미치광이여서 다른 사람이 상대하기가 어렵소. 황 비서께서 좀 영향을 주어 그의 머리를 고쳐 주시오.”



김용순과 통일전선부 일꾼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안다면, 송두율 교수 본인이 뭐라고 말할지 무척 궁금해진다.



나는 또 황석영 씨를 위해서 비교적 실력 있는 제자들을 파견해 그에게 주체사상 강의를 해주도록 했다. 그러나 역시 그것으로 그칠 뿐, 그에게 북한의 본질을 인식시켜 줄 수는 없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북한의 청소년들을 저들의 정신적·육체적 노예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한의 청년학생들까지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협작꾼들을 총동원하는 한편 남한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 거기에 걸려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 주지 못한 게 한스럽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필경 이 아픔은 북한이 변하지 않는 한 고쳐질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남을 것이다.



청년학생들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은 현실적인 악에 오염되지 않아 순결한 마음으로 이상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을 너무 모르다 보니 사악한 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기 쉽다. 북한의 통치자들은 말로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하고 청년학생들의 희망을 꽃피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개인을 우상화하고 정권을 세습해 가며 이 땅의 북반부를 생지옥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의 그 허황된 정책은 인민들을 무더기로 굶겨죽이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대량살육무기를 만드는가 하면, 청년학생들에게 수령을 옹위하는 총폭탄이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북한 통치자들의 말과 실천이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남한의 소위 좌경 친북학생들을 북한에 들여보내 한 달쯤 생활하고 돌아오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임수경의 경우처럼 한두 명을 속일 수는 있어도 1~2천 명이 동시에 들어가 여기저기 흩어져 생활하게 되면, 북한의 정체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건의



1995년 말경 나는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베이징에 들러 김덕홍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한 기업인들과 금강산 관광문제를 협의했다. 그즈음 나는 덕홍과 만나기 위해 해외출장 때는 가능하면 베이징을 경유했다. 베이징과 평양 간은 비행기보다 주로 기차를 이용했는데, 그 이유는 선양을 거치기 위해서였다. 선양에는 재단이 운영하는 지부가 있었고, 또 우리와 긴밀히 협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평양에 돌아와 김정일에게 북한의 경제는 관광업을 발전시키면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경제는 중병에 걸린 환자와 같아서 강한 주사를 맞지 않으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그런데 밑천 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그 주사약이 바로 금강산개발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남한 기업가는 북한이 금강산 근처에 자유관광단지를 내놓으면 시설은 남한 측이 조립식으로 6개월 내에 건설하겠다고 제의했다. 관광객 일인당 2백 불 정도의 입산료를 내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 계획의 골자였다. 게다가 금강산과 묘향산, 백두산에서의 관광에 관한 모든 절차 역시 북한 측 요구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 측은 아무런 투자 없이 연간 10억불 가량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나는 이 내용을 김정일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그 일이 성사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것이 내가 김정일에게 한 마지막 건의였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8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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