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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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4

황장엽 회고록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지난 이야기: 황장엽은 개인우상화가 권력우상화로 옮겨가고, 그것이 다시 인민을 노예화할 뿐 아니라 통치자 스스로를 자기 환상에 몰아넣어 머저리로 만든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김일성만 하더라도 젊었을 때는 현실적으로 사고했지만 늙어가면서 점점 자기 환상에 빠져 능력도 닿지 않는 일을 분별없이 늘려갔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도 명백하게 나타났고 죄없는 인민들만 굶주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김일성의 사망



1993년 내가 국제비서에 재임명되면서 김기남도 선전비서에 임명되었다. 나는 그에게 사상이론문제위원회 위원장직을 넘겨주겠다고 김정일에게 건의했다. 그때까지는 선전비서를 김정일이 겸직하고 있었으나 이제 김기남으로 임명한 상황에서 내가 그 위원장직에 있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내가 주체사상담당비서이므로 위원장직을 그대로 유지하라고 만류했지만, 나는 선전비서의 위신을 생각해서 그에게 위원장직을 넘겨주고 대신에 부위원장으로 있기로 했다. 또 국내선전에서의 이론문제에 관한 통제권도 선전부로 넘기고 주체사상연구소는 국제부와 통합하여 대외이론 선전에 대해서만 통제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 대신 중앙당 내에 설치된 대외선전이론문제위원회 위원장은 내가 맡고, 부위원장은 선전비서와 통일전선부 비서들이 나누어 맡았다. 그러나 각 부서가 각기 자기들만의 목적을 꾀하려 들면서 좀체로 통제를 받지 않으려 했다. 더구나 나는 다른 부서와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이 기구는 결국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북한의 경제 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외화벌이를 위해 각급 기관에서는 너도나도 무역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그 돈벌이라는 것은 보잘것없었으며, 우왕좌왕하다가 과오를 범하고 도주하는 자들도 생기고 부정사고도 많이 발생했다.



김정일은 무역회사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해외여행을 제한하려 했다. 김정일의 직접적인 비준을 받은 대표단 이외의 해외파견대표단은 예외 없이 중앙당 내에 설치된 파견심의위원회를 거쳐 승인을 받도록 했다. 공안담당비서가 위원장, 국제비서가 부위원장, 그 밖에 군수공업담당비서, 경제담당비서, 과학교육비서, 간부담당비서 등 6명이 망라되어 매주 한 차례씩 심의를 열었다. 나는 될수록 많은 대표단을 해외로 내보내자는 주장이었고, 공안담당비서는 가능하면 내보내지 말자는 주장을 폈다.



1993년 3월에는 핵사찰을 받지 않는다는 문제로 미국과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북한은 준전시태세를 선포했다가 해제했다. 김정일은 핵문제 협상에서 자신의 강경한 ‘벼랑끝 전술’이 승리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국이 전쟁을 피한 것은 현명한 조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 북한은 전쟁을 하면 했지 미국의 압력에는 굴복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는 또 북한의 고위급들이 김정일의 술 파티로 인해 적지 않게 죽었다. 술로 몸을 망가뜨리는가 하면 새벽에 귀가하면서 직접 차를 몰다가 사고가 났기 때문이었다.(극비로 모이기 때문에 운전기사를 대동하지 않았다.) 이런 소식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갈 수도 없었겠지만, 설사 그가 알고 있었다고 해도 1990년대 들어서는 통제능력을 상실한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김정일 자신이 큰 사고를 당해서 한동안 업무를 못 보는 일이 생겼다. 뒷날 알고 보니 낙마한 것이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면서도 신병치료라는 말을 믿는 척해야 했다.



김정일은 오랫동안 집무에 나서지 못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은 김일성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김정일이 다치고 얼마 있지 않아 오래도록 절교상태에 있던 김경희가 내 아내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내용은 오빠 때문에 속이 상한다는 것이었다. 짐작하건대 아마도 김정일이 낙마 후유증으로 죽게 되면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김정일은 상당히 오랫동안 나타나지 못할 만큼 심한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1994년이 되자 김일성은 겉으로는 괜찮았지만 우리와 만나 얘기를 할 때 방귀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몇 년 전부터 듣는 게 시원찮았지만, 그즈음에는 귀가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5월에 눈 수술을 받았는데, 비밀로 하여 어떤 수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하는 바람에 피로는 더욱 누적되었다. 카터와 회담하던 자리에서 김일성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는 카터의 호감을 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카터의 방문과 관련한 업무는 외교부에서 독점했기 때문에, 나와 김용순은 김일성이 차린 오찬에 한 차례 참가했을 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한편 남북정상회담이 1994년 7월 25일로 결정되면서 김일성은 더욱 들뜨게 되었다. 그가 외국손님을 접견하는 자리에 동석해서 보면, 김일성은 흥분하여 조국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마치 남한인민들이 김일성을 떠받들고 있다는 투로 김정일이 허위보고를 한 탓에 김일성으로서도 자기환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쿠바의 하바나 공항에서 들었다. 사망소식을 듣고 그날로 출발했는데, 평양에 도착하니 7월 13일이었다. 아내는 마치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 더 슬퍼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김일성의 사망을 의사들의 잘못 탓으로 돌리면서 죽일놈들이라고 욕을 해댔다.



나는 원래 기뻐서 눈물을 흘려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적었다. 왜냐하면 슬퍼서 눈물을 쏟는 것을 일종의 감상주의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이 다 울고 있는데 나 혼자 멀쩡한 눈으로 있다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들은 장례식에 참석한 내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고는 내가 적게 운다고 나무랐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내 입장에서 보면 김일성은 분명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 잘해주었고, 또 한편으로는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식 정치를 더욱 개악(改惡)함으로써 사회발전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이 너무도 커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의 죽음을 마음속 깊이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개인숭배로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극도로 마비시켜 전 인민이 땅을 치며 울도록 만든 그의 행적이 더욱 미워지는 것이었다. 북한주민을 자주의식이 없는 꼭두각시로 만든 걸 생각하면 눈물은커녕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54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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