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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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부 꿈 많던 어린 시절, 열 번째

평양 25시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5




지난 이야기> 1997년 외국어 대학을 졸업하던 날 고영환은 꿈에 그리던 외교부에 배치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모란봉시계공장 외사과 번역원으로 배치가 되고 만다. 고영환의 외삼촌이 과거 치안대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불리익을 당하는데.....



아버지는 어렵게 외삼촌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는 내 자신이 이제까지 당에 성실하게 복무하여 왔고 또 문기린이라는 외삼촌도 이미 1950년도에 사망하여, 외삼촌 문제가 너희들의 장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것 같구나, 내가 생각을 잘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으면 미리 대책을 세워두는 것인데.....



외삼촌은 1950년 인민군 후퇴 때 <치안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인민군이 다시 나오면서 개천군 안전부에 잡혀들어갔다가 병으로 죽었다던지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 자신도 너의 어머니와 결혼 뒤에 한번인가 보았을 뿐이고 소식도 한번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번 너의 배치 문제에서 외삼촌 문제가 거론이 된 모양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알아보는건데….. 우선 배치지에 가서 일하거라. 그 외삼촌 문제인지 뭔지 정리를 하여보자.>



아버지의 얼굴에는 후회의 그늘이 역력하였다. 나는 대외경제사업부에서 연일 걸려오는 전화 독촉을 받고 모란봉시계공장으로 내려갔다. 공장에는 스위스 ‘베르트랑-블량슈’ 회사에서 온 10명의 시계 기술자들이 막 도착한 직후였다. 공장에 들어가보니 스위스의 하우저 등의 기계회사에서 사들여온 시계 생산용 설비들이 6백여 대나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공기청정기까지 설치되여 이제까지 보아오던 쏘련이나 중국제, 북조선제 기계가 설치된 공장들과 질적으로 달라보였다.



공장 지배인과 당 비서를 만나보니 사람들도 괜찮았고 그 사람들 역시 내가 온 것을 무척 반가워하였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정한 실습 단계를 거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였고, 일종의 인간 수업 같은 것을 하는 것도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리라는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였다.



거기에다 유리하게 된 것은, 나의 주통역으로서 스위스 기술자 전원과 보통강호텔에서 같이 투숙하면서 출퇴근을 하며, 외국어대학 학생들의 어학 실습시 실습 지도의 책임까지 맡으라는 것이였다.



다시 신심을 가진 나는 맡은 일에 충실하였다. 공장 로동과에 지도원으로 있으면서 대표단 안내 임무를 맡은 이가 있었는데, 사람이 진취적이면서 리해력도 많았고 나하고 몇 개월 같이 일한 다음 나에게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있을 사람이 아닌데 여기 있는 동안 입당을 하도록 책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정말 힘든 줄도 모르고 맡은 일을 열성적으로 하였다. 대외경제사업부 제2설비 수입국과 ‘베르트랑-블량슈’ 회사 사이에 회담을 할 때도 내가 회담 통역을 전담하였다. 일단 나는 그렇게 내 지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어렸을 때부터 품어왔던 외교관의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북조선 권력층의 실상과 비화를 밝힌, 고영환의 평양25시, 지금까지 랑독에 리광명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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