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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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부 꿈 많던 어린 시절, 아홉 번째

평양 25시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5




시그널: “평양 25시”



내레이션 : 꽁고 주재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북조선 외교관 고영환. 보장된 출세와 사랑스런 가족을 등진 채 목숨을 걸고 망명을 선택한 그의 비망록. 그가 밝히는 북조선 국제외교의 실상과 최고 권력층의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음악: UP/DOWN



제177부 꿈 많던 어린 시절, 아홉 번째



지난 이야기> 고영환은 졸업하기 몇 달 전 대학 당위원회로부터, 외국어대학 프랑스어 교원이 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는다. 고영환이 이를 거부하자 당비서가 화를 내는데......



당비서는 “당에서 키워주었는데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대학생의 본분이다. 당에서 학생더러 탄광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면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학생은 대학 공부를 헛하였다.”라고 말하였다.



당 비서와의 면담이 있은 후 프랑스어 강좌 담당인 장 선생과 학부 당비서는 나에게 대학 교원이 되는 것이 얼마나 좋으며 영예롭고 자부심도 있는 일이니 함께 일하자고 설득하려 들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 교원으로 떨어질 바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그냥 돌아가겠다고까지 했다.



열세 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 훌륭한 외교관이 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던 아버님의 분부를 지켜 꾸준히 걸어온 12년이었고, 나의 소원 역시 외교관이 되여 이 세상 곳곳을 다니며 견문과 상식을 넓히겠다는 것이였다, 더구나 모든 학생들이 <고리타분한 직업>이라고 피하고 멀리하는 교원이 되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1977년 9월 외국어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식이 있은 지 1개월 후 우리는 대학 강당에 모였다. 당 중앙위원회 교육부에서 나온 사람이 배치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내 순서가 되었다. 나는 귀를 바짝 세우고 들었다.



『고영환, 대외경제사업부 모란봉시계공장 외사과 번역원!』



나는 그때 내 귀를 믿지 못하였다. 오히려 더 흥분하는 것은 학급 동료들이었다. 대학 교원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아차하고 머리를 쳤다. 아버님도 한자리하는 간부이고 나 자신도 대학 생활에서 남들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터라 제대로 되겠지 하며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성에 계시는 아버님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얼마 후 아버님이 평양에 올라오시여 중앙당과 교육위원회 등 여러 곳에 있는 친구들을 통하여 나의 배치가 왜 그렇게 되였는지 알아보시였다. 나 자신도 대학 선생님들을 만나 내가 보복당한 거 아닌지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별 소득이 없던 이틀 뒤, 아버님은 숙소인 평양호텔에 나를 데리고 가시였다. 아버님의 얼굴색은 매우 침통하였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채 담배만 피우시던 아버님이 이윽고 입을 여셨다.



『네가 대학 측의 권고에 귀 기울일 것을, 잘못한 것 같구나. 대학 측에서도 너의 실력은 인정을 해주는데, 대학 교원이 되는 성의를 네가 무시하니 너의 배치에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너희들에게 모두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데, 너희한테는 문기린이라는 외삼촌 한 분이 더 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망설이시더니 힘겹게 입을 떼셨다.



북조선 권력층의 실상과 비화를 밝힌, 고영환의 평양25시, 지금까지 랑독에 리광명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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