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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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부 꿈 많던 어린 시절, 여섯 번째

평양 25시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5




지난이야기> 김일성의 유일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사상 학습이 늘어났다. 고영환은 김일성의 혁명력사와 관련된 수업을 하던 중 말을 잘못해 학원 당위원회의 비판까지 받게 되는데......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하여 용서를 해준 모양이다. 그때부터 나는 정말로 말조심하여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고 동료 친구들 또한 정치성 있는 발언을 할 때는 극히 조심하였다.



나는 1972년도에 학원을 졸업, 외국어대학 불어과에 입학을 하였다. 대학은 학원보다 규율이 더 센 군사 체제였다. 학급은 소대였고 학생 총책임자는 대대장, 학우학생 책임자는 중대장, 그 밑에 부대대장, 참모장, 참모들이 임명되었고 심지어 청소 검열도 대대 위생참모가 합∙불합격을 놓곤 하였다.



대학 4학년 때인 76년 여름에 발발하였던 <판문점 도끼사건> 직후, 나는 대학에서 선발되어 프랑스인들과 직접 어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1976년에 프랑스에서 콤퓨터 2대를 도입하여 1대는 인민무력부에, 다른 1대는 평성에 있는 공학과학원 수학연구소에 설치하였는데, 나는 컴퓨터 점검도 할 겸 기술 전수를 위하여 평양에 온 3명의 프랑스 기술자들을 위한 통역으로 동원이 되였던 것이다. 나는 대학 기숙사로부터 보통강호텔 8층으로 숙소를 옮기고, 안내원역을 맡은 평성과학원 수학연구소의 박사인 강희철 선생과 같이 1년 반을 호텔에서 생활하였다.



원래 평양시 서성구역 련못동에 있던 공학과학원은 1975년에 김일성이 <평양은 소란하니 평양 주변의 위성도시인 평성으로 옮겨 평성을 과학도시로 만들라>는 지시에 따라 옮긴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실습을 나갔을 때 과학원은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청사만 덩그렇게 지어놓고 과학자용 아빠트를 지어놓지 않아, 그래도 명색이 박사, 학사, 교수들이 과학원 청사에서 10~15리 떨어진 주변 농가에서 조그만 방을 얻어 출퇴근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아예 사무실에서 석유곤로를 때면서 침식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수학연구소 소장의 친척이라는 사람이 내 숙소인 보통강호텔로 나를 찾아와 소장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맡겼다. 그래서 과학원에 들어갈 일이 있을 때 편지를 들고 수학연구소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머리가 허연 소장님께서 알루미늄 남비에 강냉이쌀 밥을 지어놓고 도토리 된장국을 끓이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나도 믿어지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사시느냐>고 물어보니 그분은 <이 다음에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으면 과학자는 시키지 말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1976년 겨울 무던히도 추웠다. 다행히도 평성과학원에는 보일러가 있었다. 그러나 석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사무실의 온도가 영하 7~8도까지 떨어졌다. 과학자들은 언 손으로 글을 쓰기가 힘들어 모포와 외투를 뒤집어쓴 채 서성거리만 하였다. 그런데 콤퓨터실에는 외국인들이 일을 하고 있는 까닭에 어떻게 구해온 전기난로가 열을 뿜고 있어서 프랑스 기사들은 온 연구소가 다 그렇게 더운 줄로 알고 있었다.



북조선 권력층의 실상과 비화를 밝힌, 고영환의 평양25시, 지금까지 랑독에 리광명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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