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여섯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2-10 16:15


내레이션: 김일성이 죽자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심화조 사건을 일으켰다. 1997년 말부터 3년간 진행된 이 사건으로 2만5,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숙청당했다. 권력의 전환기에는 늘 피바람이 몰아치게 마련이다. 김정일의 통치 방식을 계승한 김정은도 앞으로 심화조 같은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 비화를 통해 김정은의 선택을 전망한다. 추적 사건과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지난이야기> 사회안전성 심화조는 전국 곳곳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다. 간첩을 한 명 잡으면 승진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고문을 통해 간첩 루명을 씌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살해되면서 조선 전역이 공포에 빠져드는데....



김정일은 간부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협조하지 못하도록 하는 통치 방식을 즐겨 써왔다. 이런 방식은 각 부서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도 적용이 됐다. 사회안전성에 절대적인 권한을 주면서 힘을 실어 주었던 김정일은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견제를 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책임자들을 불러 강하게 질책했다.



김정일: 야, 사회안전원들도 이렇게 간첩을 잘 잡아내는데 너희들은 뭐하는 거야. 보위부와 보위사령부의 기본 임무가 간첩 잡는 거 아니야?

남1,2: 죄송합니다. 장군님.

김정일: 심화조에서 조사한 걸 보면 지금 간첩들이 중앙당에까지 침투해 있어. 이 사태를 어떻게 할 거야?

남1: 장군님, 지금 즉시 간첩소탕을 위한 대책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김정일의 속마음을 읽은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2000년 ‘조직의 질적 향상을 높여 반혁명 분자들을 철저히 소멸하자’는 안건으로 협의회를 가졌다. 창건 이래 두 조직이 공동협의회를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외적인 명분은 ‘간첩소탕’이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회안전성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사실 이들 기관들이 사회안전성의 과도한 권력남용과 허위과장 사업실태 보고를 처음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당 조직부에서 국가안전보위부 및 사법 담당 행정부부장을 맡고 있던 계응태가 이미 문성술 사건 때 제1부부장인 장성택에게 이런 점을 이야기하며 사회적으로 혼동과 불안이 증폭되고 있음을 경고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성택은 심화조의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김정일에게 계응태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장성택: (투정하듯) 장군님, 이거 계응태가 질투가 나는지 심화조 사업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김정일: 그 친구 왜 그래, 공부 좀 더 하게 하라!



김정일의 즉흥적인 지시로 계응태는 1999년 당 조직부 행정부부장 직을 내놓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김일성고급당학교 학생으로 ‘책가방’ 신세가 됐다. 김정일의 측근으로 가장 인정받았던 그의 순간적인 몰락을 보고 그때부터 누구도 심화조 활동에 대해 감히 시비를 걸지 못했으며, 결국 장성택이 이끄는 심화조는 당 위의 절대권력으로 성장하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공동작전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극비리에 진행돼야 했다. 이는 사회안전성의 배후에 여전히 장성택이 있고 그는 김정일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음악: 음모를 꾸미는 듯한



다음날부터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자신들의 선(線)을 발동해 전국의 심화조 예심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매 건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효과: 문성술 취조 장면(5편)을 도청의 느낌으로 BG

본부에 모인 록음 테프 내용은 하나같이 사회안전성의 비인간적인 학대와 허위과장으로 일관된 사업실태 등 권력남용을 명백하게 폭로하고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공동문건 형식으로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으로 인한 민심변화와 그 부정적 현상들을 골자로 하는 정세보고서를 작성하고, 방증자료인 록음 테프를 김정일에게 제출했다.



김정일은 이 문건을 통해 김일성이 죽은 이후 당·군·내각 내의 권력지반 정돈과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했던 심화조 사업이, 본래의 의도를 넘어 전 사회적인 불안과 불신으로 전파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것이 나중에는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읽었던 듯하다. 김정일은 대책보고서까지 준비한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제의서에 “제때에 충고를 줘 고맙다. 내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나라가 망할 뻔했다”며 친필사인을 하고 즉시 당 비상회의를 열었다.



김정일: 사회안전성의 권력전횡과 고문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당 중앙에 검열과를 조직하라. 지금 이 시간부터 심화조를 해산하며 그 지휘성원들을 모두 체포하라!



음악: 급박한 움직임

그러지 않아도 사회안전원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사무칠 대로 사무쳤던 인민들은 그 소식을 듣고 마치 폭동이라도 일으키듯 안전원 복장을 한 사람만 봐도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전국 각 도·시·군 안전부는 대문을 닫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도성원에 의해 검열총화에 들어갔다. 중앙당과 국가안전보위부, 무력부 보위사령부, 중앙검찰소 공동으로 조직된 검열단 성원은 전국 각 지역에 급파되어 한 주일이라는 짧은 검열과정을 끝내고 그 결과 보고서를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을 현대판 ‘민생단 사건’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시대의 구원자로 포장하려고 했다.



김정일: 동지들도 일제 특무기관이 저지른 민생단 사건을 잘 알 것입니다. 당시 ‘민생단 수자가 수천 명에 이른다’는 특무기관의 류언비어로 조직 내에서 서로 의심하고 죽인 끝에 그 희생자가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사회안전성 심화조가 바로 일제의 특무처럼 활동하면서 당과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조선에는 김일성이 민생단 혐의 문서 보따리를 불에 태우자 억울한 루명을 썼던 이들이 감동해 우는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과 영화가 있다. 당국은 이 ‘민생단 사건’을 김일성의 대범한 광폭정치와 믿음의 정치를 보여주는 력사의 한 장면으로 널리 선전해왔다.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을 자신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리용할 생각이였다. 말하자면 권력야심에 눈이 먼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한 사람이 출세를 위해 수많은 당 간부를 제거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사법기관의 수뇌부에 오르려 했는데, 장군님께서 제때에 사태를 수습하시어 억울하게 더 희생될 뻔한 수만의 사람을 구해주셨다는 것이다. 채문덕을 써먹을 만큼 써먹은 김정일은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사태를 수습할 생각이였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여섯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