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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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다섯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2-02-03 18:02


내레이션: 김일성이 죽자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심화조 사건을 일으켰다. 1997년 말부터 3년간 진행된 이 사건으로 2만5,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숙청당했다. 권력의 전환기에는 늘 피바람이 몰아치게 마련이다. 김정일의 통치 방식을 계승한 김정은도 앞으로 심화조 같은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 비화를 통해 김정은의 선택을 전망한다. 추적 사건과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지난이야기> 김정일의 지시로 사회안전성 심화조가 꾸려진다. 심화조는 김정일을 등에 업고 사람 잡이를 시작한다.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을 비롯해서, 평안남도 당책임비서 서윤석이 몇 장의 보고서만으로 간첩으로 몰리는데.....



사실 주민등록 료해라는 비과학적인 수사방법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치고 경력이 한 달의 공백도 없이 순조롭게 이어진 사람은 조선에서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때는 지금처럼 사법기관의 조직적 기능이나 임무가 구체화되지도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문건 정리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어떤 조건이나 구실도 통하지 않는, 한마디로 불가능이 없는 심화조의 수사권한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간첩을 한 명 잡으면 ‘공화국 영웅’이란 최고의 표창을 받고 승진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심화조 성원들은 시작부터 고문을 무기로 삼았다. 심화조 총지휘부의 책임자들부터 김정일이 부여한 특권과 비과학적인 수사방법을 리용해 중앙당 본부당 책임비서까지 고문할 만큼 안하무인이었으니 도나 시·군 안전부 심화조 성원들은 더 말할 여지가 없었다.



장성택의 미움을 받아 심화조 제1의 표적이 됐던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에게 가해진 고문은 끔찍했다. 평생 김일성, 김정일 두 사람을 위해 충성한 문성술은 턱에 수염도 안 난 젊은 계호들이 자기에게 수갑을 채우고 어이없는 진술을 받아내려고 달려들자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문성술: 이 새끼들 너희들 뭐야. 나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이야, 문성술. 너네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너희 정치국장 채문덕을 내 앞에 당장 데려오라!

효과: 철문 벌컥 열리며

채문덕: 이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문성술: 야, 채문덕이,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장군님께 당장 보고하라. 네 놈들을 결코 용서치 않으실 거다

채문덕: 이 늙은이가 아직도 본부당 책임비서인줄 알고 있나? 야, 죽이던가 자백을 받아내던가 해, 알았어!

계호원들: 네, 국장 동지! (무차별 구타)



문성술은 결국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지문도 미처 못 찍은 자백서를 위조하기 위해 문성술의 시체에서 손가락을 잘라 손지장을 찍었다. ‘문성술 종합진술문건’은 그렇게 완성된 것이다.



심화조의 책임자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의 미움을 받고 간첩이 된 평안남도 당책임비서 서윤석에게도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 서윤석은 얼마나 고문을 받았던지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갇히고 말았다. 서윤석의 기억은 고문 당시의 상황에서 끝나 있었다. 간호원이 주사기를 들고 다가갈 때면 “선생님 제발 주사는 놓지 말아 달라”며 무릎을 꿇고 빌 정도였다. 훗날 심화조에 책임을 떠넘기고 스스로를 조선 인민들의 구세주로 포장한 김정일은 “문성술은 신념이 투철한 사람인데 서윤석은 신념이 없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심화조가 퍼져 있는 전국 곳곳에서 복수전과 피바다가 시작됐다. 6·25전쟁 시기 구월산 유격대, 지리산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던 도당 책임비서들과 인민위원장들은 거의 전부 수감됐다. 박사, 교수, 로동자, 농민 등 직종에 관계없이 6·25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의심이 가는 이들은 심화조에 불려가 예심을 받아야 했으며 평소 심화조 성원들과 앙숙이던 사람들은 대부분 고문으로 살해되거나 간첩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심화조의 고문은 전기고문, 얼음고문, 손톱·발톱을 뽑는 고문 등 그 잔인성과 방법이 참으로 다양했다. 나중에 심화조의 죄행을 폭로하는 중앙당 간부강연회에서 당시 참가자들에게 배포한 강연내용의 일부를 성우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성우: 그중에서도 가장 악독하기로 유명했던 것은 비둘기 고문이다. 사람의 팔과 다리를 뒤로 한데 모아 묶고 매달면 가슴이 비둘기가슴처럼 둥그렇게 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게 매달아놓고는 먼저 “너 간첩이지?” 하고 물어 아니라고 답하면 군화발로 세차게 걷어찬다. 최대한 옥죈 가슴을 군홧발로 차면, 첫 발길질에는 갈비뼈가 부서지고 두 번째 발길질에는 부서진 뼈가 심장까지 찌를 만큼 안으로 박힌다.>



세 번째 발길질에 자백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끔찍했던 고문들이 많았다.



<성우: 평양시 안전국의 한 여성 예심원은 예심과정에 진술을 완강히 부정하는 여성 과학자의 젖꼭지를 도려냈다. 조선에서 흔히 ‘신 해방지역’으로 부르는, 즉 6·25전쟁 이전에는 남조선 땅이었던 옹진 지역 노인들은 망돌을 목에 매고 찜통더위 속에서 하루종일 군 안전국 마당을 걷게 해 탈진시켜 죽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죽어서 자살로 처리된 사람들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심화조의 사법처리 방법은 다른 기관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감옥 수감자수를 줄이고 성과를 올리기 위해, 일단 자백문건을 받아내 죄명이 인정되면 상부의 사인을 받아 감옥 내에서 총살했다. 중앙급 간부들 처리는 김정일의 비준을 받아야 했는데, 누구를 쏠지 이름까지 지명하여 친필서명이 떨어지면 그대로 사회안전성 간부들이 나가서 직접 처형했다. 지방에서는 지방안전국 자체 결정으로 재판도 없이 총살이 집행되기도 했다. 이런 야만적인 숙청의 폭풍이 21세기에 접어들어서까지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조선에서 진행됐다.



고통과 억울함을 더욱 키운 것은 조선의 악법인 ‘정치범 3대 멸족’이었다. 고문 중에 죽은 사람들은 물론 억울하게 간첩누명을 쓴 사람들도 본인뿐 아니라 온 가족과 친척 3대까지 정치범수용소로 실려갔다.



효과: 트럭(BG)



간부 비중이 높은 평양시에서는 하루에도 몇 대씩 트럭들이 어디론가를 향해 가곤 했다. 설사 그것이 가정집 이삿짐을 옮기는 차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시민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침통한 얼굴로 자기 가족 문제로 연결짓고 심장이 덜컥 멎는 것 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 직장에 출근해 누군가가 지각만 해도 혹시나 하고 얼굴을 볼 때까지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가슴을 조였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의 실체, 다섯 번째 시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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