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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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진실, 열한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2-02 18:03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지난 이야기> 초기 승리에 현혹된 중국군은 38선을 돌파해 계속 남진한다. 그럴수록 중국군은 보급로가 길어져 불리해지고 유엔군이 다시 전세를 장악한다. 중국군은 춘계대공세로 역전을 노리지만 대패를 당하고 끝내 38선 이북으로 밀려나고 마는데......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전쟁의 승패는 쉽게 나지 않았다. 전진도 후퇴도 없는 교착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량측 모두 지쳐만 갔다. 춘계대공세로 심각한 손실을 입은 중국은 전쟁을 계속할 의욕도 승리에 대한 자신감도 크게 상실했다. 이미 많은 희생을 낸 유엔군 역시 더 이상의 피를 흘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량측이 38선 지점에서 다시 만난 지금이 휴전협상 적기라고 생각한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중국과 쏘련에 휴전협상 용의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쏘련이 반응했다. 1951년 6월 24일, 쏘련은 유엔에서 휴전회담을 공식 제의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6부에서 당시 유엔 주재 쏘련대사 야코프 말리크의 연설내용이다.



야코프 말리크: “량쪽 다 같이 조선반도 전쟁의 평화적 해결에 나서야 합니다. 그 첫 단계로 교전국 간에 휴전을 하고 쌍방이 38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문제가 토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피에 젖은 전쟁을 끝내려는 진지한 열망이 있다면 이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 북조선, 미국이 잇따라 쏘련의 휴전 제안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협상 분위기가 고조돼갔다. 그것은 당장 통일을 고대하며 치렬한 전쟁을 견뎌온 남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리승만 정부는 중국군의 완전 철수와 인민군의 무장해제, 북조선에 대한 제3국의 원조방지 등 기타 요구조건들을 내세우며 현 상태에서의 휴전을 단호히 반대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6부에서 휴전회담 초대 남조선 대표로 참석했던 당시 백선엽 소장의 증언이다.



백선엽:“시초에 우리 측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우리는 통일이 없는 휴전은 우리는 할 수가 없다고 해서 반대를 했지요.”



하지만 휴전협상을 위한 준비는 거침없이 진전되었다. 1951년 6월 30일, 유엔군도 휴전협상성명을 공식발표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6부에서 당시 유엔사 대변인 프랭크 알렌의 발표이다.



프랭크 알렌: “유엔군 사령관 리치웨이가 김일성과 팽덕회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6월 30일 나의 첫 번째 메시지는 원산항에 설치된 단마르크 병원선상에서 회담 개최를 제안한다는 것이다. 또한 량측의 동등한 접근이 이뤄질 것을 제안한다. 기자들과 모든 관련단체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완전히 중립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질 것이다.”



한편 쓰딸린은 막후에서 동맹국들에게 휴전문제와 관련해 구체적인 행동방침을 지시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쓰딸린은 휴전교섭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중국의 모택동에게 떠맡겼다. 당시 휴전교섭에서 김일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을 뿐 모든 것은 쓰딸린의 위임을 받은 모택동이 직접 관장해나갔다. 옛 쏘련의 기밀문서 6월 30일자 기록을 재구성해본다.



모택동: 쓰딸린 동지, 리치웨이가 드디어 휴전교섭을 청해왔습니다. 7월 초까지는 김일성이 회답을 해야 합니다.

쓰딸린: 회답 서신을 보낼 때 김일성과 함께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도 서명해야 합니다. 미국은 북조선 대표만의 서명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모택동: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리치웨이가 회담 장소를 원산 앞바다의 단마르크 병원선으로 제안해왔습니다.

쓰딸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모택동: 단마르크는 나토 회원국이 아닙니까? 적의 함정을 북조선 해군의 요새기지인 원산에 상륙시키는 건 아무래도 적절치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38선 부근 개성지역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쓰딸린: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리치웨이한테 그렇게 요구하십시오.

모택동: 알겠습니다. 교섭이 시작되면 우리가 불리한 상황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쓰딸린 동지께서 모든 걸 확실히 책임져주시길 바랍니다.

쓰딸린: (말도 안 된다는 듯) 무슨 말씀입니까? 교섭을 지휘할 사람은 모택동 동지입니다. 쏘련은 그저 조언이나 할 뿐입니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귀하가 직접 진행해야 합니다.



모택동이 회담장소로 주장한 개성은 전선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중국군과 인민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때문에 개성에서의 회담 개최는 인민군과 중국군에 심리적으로 유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빠른 진행을 위해 결국 받아들이고 말았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의 막이 올랐다. 회담 장소는 개성 선죽교 부근의 아흔아홉칸 기와집 내봉장, 북조선 측에서는 인민군 참모장 남일 중장을 수석대표로, 유엔군 측에서는 미 해군 중장 조이를 수석 대표로, 각각 5명의 대표들이 회담장으로 모였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6부에서 당시 회담 대표로 참석했던 인민군 리상조 소장의 증언이다.



리상조: “우리는 담판이 시작됐을 때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한 2-3일이면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회담은 첫날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당일 북조선 측은 개성부근을 먼저 점령하고 회담장소로 들어가려는 유엔군 측을 1시간 동안이나 저지했다. 그리고 휴전대표라는 표시로 사전에 합의한 흰 기발 표시를 유엔 측의 항복협상이라고 선전했다. 기발 크기나 의자의 높이 등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치선전과 기선제압의 수단으로 리용됐다.



북조선 아나운서: “그렇게도 오만무례하던 미제가 흰 기를 들고 담판 장으로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이른바 강대국의 체면도 돌볼 처지도 못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승리였습니다."



협상도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회담의제 선정부터가 치렬했고 무려 보름이나 걸렸다. 군사분계선 위치와 외국군 철수, 휴전감시체제, 포로교환, 등 안건 하나하나도 모두 넘기 힘든 고비였다. 회담이 난항에 빠지면 전선에서는 어김없이 포성이 울렸고 서로가 한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한 고지전투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그야말로 휴전회담은 총성 없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추적, 사건과 진실“6. 25전쟁의 진실” 열한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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