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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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의 진실, 열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1-25 17:58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지난 이야기> 김일성과 쓰딸린의 거듭되는 원군 요청에 중국은 크게 망설인다. 하지만 유엔군이 압록강 가까이로 북진해오자 직접적인 위협을 느낀 중국은 드디어 참전을 결정한다. 전세는 또다시 역전되고 유엔군은 남으로 밀려 다시 후퇴하는데…….



1950년 12월 31일, 중국군은 인민군과 함께 38선을 넘어 남으로 진격했다. 중국군의 3차공세가 시작된 것이었다. 1월 4일, 서울은 다시 중국군과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1월 8일, 유엔군은 37도 선인 평택-삼척 계선까지 후퇴했다.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국은 조선반도를 포기하고 철수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남조선 정부와 약 30여 만의 주민들을 뉴질랜드 령의 서사모아 섬으로 이주시킨다는 것이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5부에서 당시 미군정 정치장교 제임스 하우스만의 증언이다.



제임스 하우스만: “그 계획은 말 그대로 철수, 피난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는 미군과 남조선 국군을 철수시킨다는 안을 검토하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그 모든 것은 배로 수송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결정은 역시 어디로 가느냐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계획은 현실성이 희박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와이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미국은 최후의 수단으로 원자탄 사용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그 만큼 유엔군으로서는 매우 위급한 시기였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5부에서 아카기 간지 일본 게이오대 교수의 말이다.



아카기 간지: “미국은 6. 25전쟁 중 조선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을 두 번이나 신중히 검토했습니다. 처음에는 1950년 11월부터 그해 겨울 사이 유엔군이 중국군에 밀려 퇴각을 하는데 그때 어떻게 해서든지 패배를 막고 싶어 핵무기 사용을 신중하게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중국군이 계속 남진해 내려갈수록 전황은 그들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사실 38선을 넘기 전부터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38선을 넘어 남진하는 것에 대해 반대가 컸다.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에서 출판한“건국 이래 모택동 문고”에서 당시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문고에 따르면 1950년 12월 13일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38선 돌파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팽덕회는 보다 신중해야 한다며 극구 반대했다.



모택동: 38선에서 공격을 멈춘다면 정치적으로 불리합니다. 최소한 서울을 점령하고 1월 중순에 병력을 보충하여 계속 남진해야 합니다.

팽덕회: 모택동 동지, 38선 돌파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3.8선 이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보급로가 길어져 작전수행이 어렵습니다.

모택동: (단호히) 정치 군사적으로 유리한 현 상황에서 적이 재정비를 하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선제타격을 가해 38선을 돌파하시오!



팽덕회는 중국군의 전선이 길어질 경우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같은 작전을 펴 다시 반격해 올 것을 우려해 3.8선 돌파를 주저했다. 하지만 초기 승리에 도취돼 있던 모택동은 팽덕회의 주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군은 계속 진격했다. 그런데 유엔군이 37도 선까지 후퇴한 그날 진격을 멈추었다. 더 이상의 남진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팽덕회 사령관의 독자적인 결정이었다. 쏘련 대사 슈티꼬브와 김일성이 계속 남진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팽덕회는 결단코 반대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5부에서 일본 도요가쿠엔대 교수 주지안룽의 말이다.



주지안룽: “당시 중국이 전체 군사력을 동원해 전쟁을 할 경우 최대한 서울까지 전진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 전진하면 미국이 다시 인천상륙을 시도해 중국군을 포위했을 겁니다. 때문에 팽덕회는 전진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재차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팽덕회는 김일성에게 정 그렇다면 좋다, 내가 자리를 내줄테니 당신이 직접 지휘하라, 당신이 인민군대를 지휘해 전쟁을 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일성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군과 인민군은 37도선에서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에 들어갔지만 이미 너무 멀리 내려와 있었다. 보급선은 길게 늘어났고 식량과 무기, 탄약도 부족했다. 중국군이 진격을 멈춘 사이 유엔군은 재빨리 전렬을 가다듬고 1951년 1월 25일 일대 반공격을 개시했다.



중국군은 서둘러 4차 공세에 들어갔지만 유엔군의 대규모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중국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유엔군은 한발 한발 북진해갔다. 3월 14일, 유엔군은 다시 서울에 입성했다. 3월말에는 38선 부근까지 진격해갔다. 전쟁의 주도권은 다시 유엔군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중국군도 완강했다. 4월 22일, 중국군은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5차 총공세에 돌입한다. 이른바 춘계대공세였다. 맥아더의 후임으로 유엔군 사령관이 된 리치웨이는 맹렬한 화력으로 중국군을 저지하는 한편 북조선의 전 지역을 폭격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에 들어갔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3부에서 당시 중국군 15병단 후생 위생부 소속 위중원의 증언이다.



위중원: “제일 무서운 건 비행기, 두 번째로 무서운 건 폭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어전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사망자 70%가 모두 방공호에서 죽었습니다. 위에서 비행기 날지, 순식간에 폭탄 퍼붓지, 비행기가 한번 뜨면 바로 2대, 3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지나가고 나면 모든 게 끝이었습니다.”



전투는 갈수록 치렬해졌고 유엔군과 중국군 모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유엔군은 중국군의 끈질긴 공세에 다시 60키로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하지만 이내 서울 북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서 중국군의 춘계공세는 완전히 분쇄됐다. 참전 이래 최대 손실을 입고 38선 이북으로 밀려난 중국군, 동시에 38선 부근까지 진격해온 유엔군, 전쟁은 다시 처음 상태로 되돌아왔다. 서로가 밀고 밀리는 전쟁, 그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추적, 사건과 진실“6. 25전쟁의 진실”열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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