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사건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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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의 진실, 아홉 번째

추적 사건과 진실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11-18 17:41


나레이션: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의 평온을 무섭게 깨뜨리며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성이 울려 퍼진다. 3년 동안 전개된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그 전쟁의 도발자는 과연 누구인가?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이야기> 남침 한 달여 만에 인민군은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조선의 전 지역을 장악한다. 하지만 유엔군의 참전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완전히 뒤바뀐다. 인민군은 퇴각하고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 류역까지 이르는데…….



남침결정 당시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미군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지체 없이 북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정작 김일성과 쓰딸린이 원군을 요청하자 중국은 크게 망설였다. 당시 중국 지도부 내에서 모택동을 제외한 대다수는 참전을 반대했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5부에서 일본 도유가쿠엔대 교수 주지안롱의 말이다.



주지안롱: “그들이 반대한 리유는 중국은 이제 막 통일됐기 때문에 우선 국내 경제건설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전쟁에서 진다면 미군은 중국으로 진격해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국은 큰 타격을 입게 될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군의 많은 지도자들 또한 군대 안에 전쟁을 혐오하는 정서가 만연해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몇 십 년의 전쟁을 거쳐 나라가 겨우 평온해졌는데 왜 또 다른 나라를 위해 전쟁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오자 모택동은 크게 불안해졌다. 더구나 중국은 6. 25전쟁 초기 미국이 중국의 대만 침공을 우려해 미 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하자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오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모택동은 1950년 10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조선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5부에서 정 더후웅 당시 중국 67군 정찰대의 말이다.



정 더후웅: “정부에서는 미국에 대항하고 북조선을 돕자고 호소했습니다. 모택동은 이미 중앙에 중국이 북조선을 해방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전쟁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의 결정은 내려왔고 미국에 대항하고 북조선을 돕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택동은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걸고 조선으로의 출병을 결정했지만 이를 기회로 중국군을 현대화하자는 속심도 갖고 있었다. 쏘련의 현대화된 무기와 장비로 락후된 중공군을 무장하려는 의도였다. 1950년 10월 8일, 모택동은 주은래 외교부장을 모스크바로 급파했다. 쓰딸린은 무기 및 장비와 제조 기술 제공에는 동의했으나 공군 지원은 2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말했다.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우려해 공군 지원을 주저했던 것이다. 중국이 난색을 표하자 쓰딸린은 출병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쓰딸린(격앙) “중국이 곤란하다면 출병하지 않아도 됩니다. 북조선이 없어지더라도 우리는 역시 사회주의이며 중국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말을 들은 모택동은 10월 12일 쓰딸린에게 북조선에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통보한다.



부관 : (다급히) 모택동이 조선에 파병을 못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쓰딸린 : (화를 내며) 내버려둬. 미국이 우리의 이웃이 되게 놔 둬!

부관 : 그럼 김일성한테는 뭐라고 통보를 해야 합니까?

쓰딸린 : 조선반도를 포기하고 북조선의 남은 군대는 모두 만주로 철수시키라고 해!



김일성은 경악했다. 정세의 긴박함을 느낀 모택동도 같은 날 시급히 정치국 회의를 열어 중국군의 참전을 최종 결정했다. 10월 13일 모택동은 쓰딸린에게 다시 출병을 하겠다고 알렸고, 쓰딸린도 마음을 바꿔 중국 군대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1950년 10월19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출병 결정문이 하달됐다. 명칭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은 팽덕회였다.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은 북조선의 험준한 산악 지역에 잠복했다. 6일 뒤 국군 1사단과 첫 전투를 치른 중국군은 10월말 1차공세를 시작했다.



효과 : 중국군 진격(피리소리+격렬한 전투)



전세는 다시 역전됐다. 유엔군은 유격전과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군에게 여지없이 무너졌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5부에서 당시 미 187 공수련대 래리 오켄도의 증언이다.



래리 오켄도: "그들이 공격할 때는 피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고지에서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고 또 발사하고 계속 발사해도 계속 돌격해왔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으며 마치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같았습니다."



1차 공세를 마친 중국군은 11월 6일 갑자기 전선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또다시 산으로 숨어든 것이다.



당시 팽덕회가 파악한 유엔군은 공군력이 우세한 반면 공격정신이 약하고 야간전투와 근접전투를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북진으로 보급로가 길어진 것도 큰 약점이었다. 1차 공세작전 이후 2차 공세를 시작하기 전까지 20일간 모습을 감춘 것도 치밀한 계산에서 이뤄진 것이였다. 유엔군의 막강한 공습을 피하면서 유엔군을 북쪽으로 바짝 유인해 격퇴하기 위한 전술이였던 것이다. KBS 기록영화 6.25전쟁 5부에서 당시 조수아 찬스 중국군 정치장교의 증언이다.



조수아 찬스: “행군은 주로 밤에 했습니다. 낮에는 모두 방공호안에 숨어있었습니다. 눈이 올 때는 흰 천을 걸치고 행군을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낮에 밖에 있는 것이 금지됐고 모두 산에 올라가도록 했지요. 각자 삽 한 자루씩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비행기를 피했습니다. 때문에 적이 비행기, 대포 등 또 다른 신식 무기로 공격해오더라도 산이 파괴될지언정 방공호 안에 있는 우리 중국군은 아주 안전했습니다.”



팽덕회의 전술은 주효했다. 이때까지도 중국군의 전술을 미처 파악 못한 유엔군은 11월 24일,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한다. 유엔군 사령부는 막강한 공군력과 화력을 보여주면 중공군이 다시 공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11월26일부터 상황이 역전돼 오히려 유엔군이 방어를 하는 상황으로 정세가 급변했다. 추수감사절인 11월 23일까지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락관했던 유엔군은 38선 이북의 거의 전 지역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추적, 사건과 진실 “6. 25전쟁의 진실” 아홉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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