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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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소녀의 참을성

부치지 못한 편지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2




보고 싶은 샘, 잘 지내고 있지? 여기는 무더위가 한풀 꺾여 이젠 살만 하다네. 한낮에는 여전히 덥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게 느껴지네.



이제 3개월 정도 일하고 나니, 여기 진료 환경에도 익숙해졌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 대해서는 쉽게 적응되질 않는군. 특히 아이들이 아이답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하는 데는 매번 깜짝 놀라고 있네. 아파도 칭얼거리는 아이들이 거의 없고, 아픈걸 부끄러워하는 듯한 인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네. 특히 며칠 전 한밤중에 업혀 온 진경이라는 아이의 참을성 앞에서는 혀가 내둘러지더군.



진경아버지 : 안에 누구 안 계십니까? 누구 없습니까?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한스 : 누구세요? 무슨 일입니까?



진경아버지 : 선생님, 우리 딸 좀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한스 : 일단 아이를 이리로 눕히세요.



한스 :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진경아버지 : … 3일 정도 됐습니다.



한스 : 3일 이라고요? 그동안 치료받은 적이 없습니까?



진경아버지 : 병원에 데려가긴 했는데 약이 없어서 치료를 못받았습니다. 장마당에서 겨우 약을 구해다가 먹였는데, 도무지 차도가 없어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약봉지 꺼내는 소리, 불안해하며) 선생님, 이 약을 먹였는데요....



한스 : 항생제군요. 약을 먹은 후에 애가 어떻든가요?



진경아버지 : 아프다는 소리는 안 하는데, 밤에 잠을 못 잤습니다. 죽을 먹이면 다 토하구요. 피도 계속 나고, 열도 높았습니다.... 선생님 우리 진경이 괜찮겠지요? 우리 딸좀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한스 : 진정하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진경아 내 목소리 들리니?



진경 : 네.



한스 : 이제 병원에 왔으니까, 치료받으면 괜찮아 질거야. 겁먹지 말고.. 다리 말고 아픈 데는 없니?

진경 : 일없어요. 근데 약을 먹고 나면 속이 매스껍고 좀 어지러워요.



한스 : 진경이 아버지, 그 약 좀 다시 보여주십시오.



진경아버지 : 네, 여기 있습니다.



한스 : 아무래도 이 약이 진경이한테는 맞지 않는 것 같군요. 우선 상처부터 꿰매야겠습니다. 밖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진경이의 상처는 스무 바늘이나 꿰매야 할 정도로 꽤 심했네. 게다가 상처에 덧까지 났더군. 마취를 하는 동안 많이 아팠을 텐데, 진경이는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참더군. 8살 밖에 먹지 않은 어린 소녀가 그랬다는 걸 상상할 수 있겠나? 하긴 3일이나 고열에 시달리면서 통증을 참아냈으니, 마취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잘 참는 진경이가 대견스럽게 느껴지기 보다는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네. 아프면 아프다고 투정을 부려야 할 나이 아닌가?

상처를 꿰매고 해열제와 항생제를 다시 처방했는데 다행히 하루 만에 상태가 좋아지더군. 치료가 잘 끝났지만 마음이 편치 않더구만.



진경아버지 : 아이구, 선생님 오셨습니까? 선생님 덕분에 우리 진경이가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스 : 아닙니다. 앉으세요. 앉으세요. (의자에 앉고) 그래 진경이는 좀 어떻습니까?



진경아버지 :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 막 잠이 들었는데... 진경아, 한스 선생님 오셨다. 진경아.



한스 : 자게 놔두십시오. 그보다도, 진경이가 먹었다던 그 약을 장마당에서 구했다고 하셨지요?



진경아버지 : 네. 아주 힘들게 구한 겁니다.



한스 : 남조선 약이던데....... 여기 와서 남조선 약은 본 적이 없거든요.



진경아버지 : 장마당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그나저나 좋은 약인 줄만 알았는데.....



한스 : 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진경이한테 맞지 않는 약이었어요.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꼭 확인해 보고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님, 다른 사람들도 장마당에서 약을 구합니까?



진경아버지 : 대부분 그렇지요.



한스 : 의사의 처방도 없이 약을 먹게 되면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 걱정이군요.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어쩌다가 진경이가 다쳤습니까? 넘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진경아버지 : 학교에서 고철을 주우러 갔는데 제 딴엔 표창을 받아보겠다고 욕심을 낸 모양입니다. 무거운 고철을 들다가 그만 사고가 났답니다.



한스 : 학교 일로 그랬다면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응급처지도 안되여 있더군요.



진경아버지 : 학교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다친 진경이가 잘못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까요? 저희 같은 사람은 하루만 못 벌어도 살기가 힘들어서요....



한스 : 바로 퇴원하셔도 됩니다. 대신 상처는 꼬박꼬박 소독해야 하니까 며칠간은 병원에 나오셔야 합니다.



진경이는 오늘 퇴원했네. 퇴원하기 전에 나를 찾아와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갔지. 똑똑하고 예의바르고 귀여운 아이였네.



진경이와 같은 수많은 아이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네. 북조선은 무상의료뿐만 아니라, 무상교육도 실시하고 있네. 하지만 교육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고철을 주어오라고 시킨다는 게 말이나 돼나? 그리고 고철만 줍는 것이 아니라, 토끼도 키우고 약초도 캔다고 하더군. 깡패집단도 아니고 나라가 나서서 어린이들에게 로동을 시킨다는 건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일세.



조선에서는 리해하기 힘든 일들이, 아니 잘못된 일들이 국가 주도하에 일어나는 것 같네. 아직 자네에게 구체적으로 말은 못하겠지만, 뭔가 거대한 힘이 이 땅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정말 답답하네. 샘, 나에게 행운을 빌어 주게나.



1999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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