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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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조선의 친구

부치지 못한 편지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2




정말 오랜만이지 샘? 지난 두 달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네. 단동에서 가져온 의약품들을 정리하자마자 진료를 시작했는데, 기하급수적으로 환자가 늘더군. 소문이 난 모양이야. 그 덕에 하루에 100명이 넘는 환자를 보느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었네.



게다가 여기 여름은 습도가 높아 어찌나 후덥지근한지 아주 죽을 지경이네. 랭방 시설이 있긴 하지만 작동이 되질 않아 땀만 줄줄 흘리고 있네. 모기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라네. 아프리카 모기보다는 작지만 이놈들은 정말 끈질기게 달라붙어 진을 빼 놓곤 한다네. 그저 빨리 선선한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네.



내가 여기에 와서 새로 생긴 취미가 있는데, 진료가 끝나면 대동강에 나가 강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한 잔씩 하는 거네. 밤이 되면 평양은 암흑으로 변하는데, 그 덕에 별들이 선명하게 보인다네.



자네는 북조선의 맥주를 마셔보지 못했지? 늘 푸념만 늘어놓다가 자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겼군. 다른 건 몰라도 조선의 술 맛은 정말 기가막히다네. 맥주도 그렇지만 각종 발효주도 맛이 좋아.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같이 한 잔 하세.



술 얘기를 하니 얼마 전 치료를 해준 할머니가 생각나는군. 60이 좀 넘은 할머니가 아들 등에 업혀 왔는데, 보름 전부터 열이 나고 허리가 아팠다고 하더군. 붓기도 있어서 소변검사를 해보니 방광염이 심해 합병증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네. 당장 환자를 입원시켰지. 일단 환자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영양제와 치료제를 같이 투여했다네. 다행히도 치료를 시작하자마자 효과가 나타나 3일 정도 지나니 아주 상태가 좋아졌네. 곧 퇴원을 시켰는데 며칠 지나서 그 할머니가 병 하나를 들고 병원에 찾아오더군.





한스 : 어,,,, 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또 어디가 아프세요?



할머니 :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제대로 인사도 못드리고 가서 이렇게 다시 왔습니다.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선생님 땜에 살았어요.



한스 : 무슨 말씀을요. 그래 이제 아프시진 않습니까?



할머니 : 그럼요 그럼요. 이 늙은 몸뚱아리를 그렇게 정성껏 돌봐 주셨는데 아픈데가 있겠습니까. 내 평생에 그렇게 의사한테 대접받아 보기는 처음 이었습니다.



한스 : 당연히 제가 할 일이었는데요 뭐.. 좋아 지셨다니 다행입니다.



할머니 : 선생님 이거, 집에서 담근 술인데, 머루주라고.. 아주 맛이 괜찮습니다. 선생님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는데, 좀 드셔보시라고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한스 : 아이구, 할머니. 이러실 필요없습니다.



할머니 : 선생님, 제가 이거라도 드리지 않으면 마음이 안 편해서 그럽니다. 꼭 받아 주십시오.



한스 : 할머니도 참. 다음부턴 이러지 마십시오. 그리고 혹시 같은 증상이 생기시면, 참지 마시고 바로 병원으로 오세요. 아플 때 바로 치료하면 지난번처럼 입원까지 안 하셔도 되니까요. 아시겠죠?



할머니 : 또 그렇게 아프면 그 땐 죽어야지요… 한 입이라도 덜어줘야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 텐데.....



한스 : 할머니!



할머니 : 아이구 제가 별소리를 다하네요. 선생님 바쁘신데 늙은이가 주책없게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아프면 죽어야지’라는 말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리더군. 그 할머니가 내가 조선에 온 리유를 되돌아보게 만들더구만. 그 날 저녁 할머니가 준 머루주를 가지고 대동강으로 나섰네. 이번엔 김복식과 함께 말일세. 술이 향도 좋고 부드러워서 술술 잘 넘어가더군. 그런데 생각보단 도수가 높았는지. 어느새 나도, 김복식도 취해버렸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김복식이 처음으로 속내를 내비치더군.



김복식 : 한스 선생, 나 솔직히 선생한테 좀 놀랐습니다.



한스 : 그래요? 왜요? 실력이 형편없는 줄 알았더니, 옆에서 보니 괜찮은 것 같습니까? (기분좋은 목소리) 하하하 다른 게 아니라, 예전에 아프리카에서 구호활동 할때도 김선생과 똑같이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활동하러 다니는 사람은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입니다.



김복식 : 후훗, 그런 건 아닙니다. 음…벌써 선생을 만난 지 5개월이 지났군요. 난 맨 처음엔 한스 선생이 리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 일도 아니고, 뭐가 차례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든 봉사활동을 하는지.. 솔직히 좀 아니 꼬아 보이기도 했구요, 며칠 그렇게 뛰어 다니다가 제풀에 지쳐서 그만두겠거니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한스 : 흠흠…그런데 내가 좀 오래갔죠?



김복식 : 그러게나 말입니다. 결국엔 이렇게 나까지 같이 뛰어다니게 만든 것 아닙니까? 하하하 … 내가 한스선생 만나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나도 학교 때는 꿈도 있고, 낭만도 있는 문학 청년이었습니다.



한스 : 그래요?



김복식 : 다 잊고 살았었는데, 한스 선생 사는 걸 보니, 부럽기도 하고,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무튼, 선생 덕에 내 머리가 아주 복잡해졌어요.



한스 : 이거,,,,,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내 덕에 잊었던 것을 다시 찾았다면 좋은 거 아닙니까.



김복식 : 그나저나 여러 나라를 두루 가보셨다죠? 그 얘기 좀 해주십시오. 우리 딸애한테 한스 선생 얘기를 했더니, 아주 궁금해 하더라구요.



한스 : 그런 얘기라면 앞으로 얼마든지 하지요. 대신 김선생도 조선 얘기 좀 해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아십니까?



김복식 : 그러셨습니까? .. 한스 선생의 전임자였던 그 스위스 의사분도 굉장히 답답해 하셨다고 하더군요. 우리 조선이 좀 답답한가 봅니다. 앞으론 틈틈이 말씀해 드릴 건 해 드리죠. (너스레를 떨며) 근데 한스 선생이 궁금한게 너무 많아서 겁이 납니다.



한스 : 제가 호기심이 좀 많습니다. (호탕하게) 자자… 매번 혼자 마시다가 이렇게 둘이 마시니 정말 좋군요. 앞으로 종종 이렇게 얘기를 안주 삼아 한 잔 씩 합시다.



김복식 : 좋지요. 나도 한스 선생이랑 얘기를 하고 나니 가슴이 시원합니다. 자, 한잔 쭉 냅시다.



진료를 도와주는 두 명의 간호원이 있지만, 누구보다도 김복식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네. 시간이 지날수록 느끼는 거지만, 김복식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성실하고, 책임감이 아주 강하고. 그가 없이 진료실이 제대로 굴러갈 지 의문이네. 아마 자네도 김복식을 만나면 금세 친해질 거야. 자네나 나나 사람 보는 눈이 비슷하질 않나. 아 참, 김복식도 술을 아주 좋아한다네. 언제 한번 우리 셋이 술 한잔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이제 친구가 생겨 마음이 너무 편하네. 사람 사는 이치는 세계 어딜 가나 마찬가지 인 것 같네.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 내가 먼저 김복식에게 완전한 친구가 되어야겠네. 낯간지러운 얘기로 들리겠지만,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꽤 외로웠다네. 그 덕에 자네 생각은 많이 했지만 말이야.



샘, 그럼 다음에 또 편지 하겠네.



1999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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