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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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부 운명의 스위스 류학, 두 번째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어느 날 집에서 전화로 교환을 불러 더듬거리는 영어로 ‘남조선 대사관’ 전화번호를 물었다.교환수는 남조선 제네바 대표부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 번호를 간직했다. 전화번호부를 찾으면 간단했겠지만, 프랑스어를 주로 쓰는 제네바에서 나는 눈 뜬 장님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게 로씨야어인데, 로씨야어는 스위스에서 써먹기 어려운 언어였다. 미국 대사관에 직접 전화하면 되겠지만, 영어를 못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물어보려면 천상 우리말로 물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 대표부에는 전화할 수 없어 남조선 대사관 전화번호를 물은 것이다. 서울에 온 후 여러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남1 : 그런데, 일남 선생 어떻게 남조선 대사관에다 전화할 생각을 다 했어요.



일남 : 영어를 못하니 미국 대사관에 직접 전화할 수는 없고, 북조선 대표부에는 더더구나 안 되고, 그래서 남조선 대사관으로 련락한 것입니다.



녀2 :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고민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고민도 안 했다. 나에게는 남조선이나 미국이 매우 친근한 대상이었다.

나는 모스끄바에서 공화국 대사관 번호가 붙은 차를 타고 미국 대사관 안에 있는 ‘미국인 구락부’를 아무 거리낌없이 들어갔던 사람이다. 거기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도 마시고 미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코카콜라도 마시면서 히히덕거렸던 조선 청년이 나다. 인민들이야 미국놈 하면 미제 승냥이 하면서 부들부들 떨어야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9월 28일 아침 남조선 대사관에 전화하기로 결심했다. 리철이 나가면 전화해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 리철은 평양에 가고 없었다. 리철은 내 학원문제만을 위해 제네바에 온 게 아니었다. 아마 스위스 은행에 보관하고 있는 김정일의 비자금 관계 일도 처리하러 나온 것 같았다. 리철이 “지도자 동지의 은행일을 봐야 한다.”고 한 것으로 봐서, 은행관계 일을 김정일에게 보고하기 위해 평양에 갔을 것이다.



학원에 간다고 하고 집을 나왔다. 내가 가지고 있던 외교관 려권과 공무 려권 등 려권 세 개를 모두 들고 나왔다.



해설 :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의 교육 문제 때문에 10년 동안 아들과 제대로 생활해보지 못했던 성혜랑은 이날 아침 이후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성혜랑은 자신의 수기에서 ‘9월 28일 화요일’이라는 제목으로 당시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리일남 : 엄마, 나 학원가.



성혜랑 : 잠깐만 기다려. 바로 챙길게.



리일남 : 엄마, 이제 바래다 줄 필요 없어. 이젠 길도 다 익혔고, 학원까지 그렇게 멀지도 않으니까 얼마든지 나 혼자 갈 수 있어.



성혜랑 : 그래도 아직 말도 서툴고,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니? 엄마가 바래다줄게.



리일남 : 아휴, 엄만, 내가 뭐 어린앤가. 뻔한 길인데 나 혼자 가두 돼.



성혜랑 : 정말 일없겠니?



리일남 : 아 글쎄, 일 없대두.



성혜랑 : 그래 그럼, 조심히 다녀와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련락하구.



리일남 : 잠깐 엄마!



성혜랑 : 왜 그러니?



리일남 : 우리 엄마 또 털옷 단추를 잘못 채웠네. 녀자가 단정한 멋이 있어야지.



성혜랑 : 이 녀석이 이젠 엄마를 놀리네.



리일남 : 자... 다 됐다. 엄마 갔다 올게. 걱정하지마 엄마.



성혜랑 : 그래, 잘 다녀오너라.



기차를 타고 한 두 정거장 지나서 공중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하면 남조선 대사관에서 미국 가는 법을 가르쳐 줄 것 같았다. 남조선 대사관 전화가 울렸다.



직원1 : Good morning, this is the Korean Embassy in Switzerland. May I help you?



리일남 : 나는 조선 외교관입니다. 미국 려행을 하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직원1 : 끊지 말고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담당자를 바로 연결시켜 드리겠습니다.



리일남 :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직원2 :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미국 려행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리일남 : 네, 그렇습니다. 저는 북조선 외교관 려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 려권가지고 미국려행을 갈 수 있을까요?



직원2 : 쉬운 문제가 아닌데 전화로 얘기하는 것보다는 일단 만나서 얘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계신 곳이 어디십니까?



리일남 : 어... 여기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고, 기차로 한 정거장만 가면 제네바종합대학입니다. 그럼 대학 앞에서 만나는 건 어떻습니까?



직원2 : 좋습니다. 그럼 거기서 만납시다.



당시 내가 아는 곳은 제네바종합대학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따져보는 게 체질화된 지금 같았으면 그처럼 쉽게 전화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그처럼 간단하게 남조선 대사관 사람과 만날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게 말해서 순진한 청년의 철없는 행동이었고, 나쁘게 말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미국 갈 욕심에 눈이 먼 상태였다. 꽉 짜여진 세계에서 살던 청년이 넓은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뿐이었다.



대학 앞에서 기다리니 세 사람이 다가왔다. 나는 남조선 대사관에서 나온 사람이란 것을 확인하고는, 내 려권을 보여주었다.



리일남 : 이 려권을 가지고 미국에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직원2 : 쉬운 문제가 아닌데, 이렇게 길에 서서 얘기하지 말고, 우리 대표부에 들어가서 협의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그런 문제는 길에 서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차를 타고 남조선 제네바 대표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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