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제61부 운명의 스위스 류학, 첫 번째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82년 여름 제네바에서 철수한 정남이 일행이 평양에 돌아왔다. 정남이와 남옥이는 가을 학기부터 모스끄바의 프랑스 대사관 학교로 편입하기로 하고 그 수속이 끝난 상태였다. 나만 붕 떴다. 나는 평양에 남아야 될 형편이었다.



해설 : 1980년 3월에 제네바로 류학을 떠난 김정남 일행은 주변 정세가 나쁘다고 해서 모스끄바로 거처를 옮겼다. 여름방학이 되자 모스끄바에 있던 성혜림과 김정남, 그리고 일남의 가족들이 평양으로 들어왔다. 리일남의 어머니 성혜랑은 아들의 대학 문제가 걱정돼서 먼저 귀국한 상태였다. 성혜랑의 수기를 잠시 살펴보자.



성혜랑 : 애들을 모스끄바 프랑스 학교로 전학시키고 제네바를 떠난 우리는 모스끄바 바빌로바 거리 집에서 생활을 꾸렸다. 나는 평양에서 아직도 대학에 못 가고 있는 아들 때문에 속이 타서 1월에 먼저 평양에 나갔다. 일남이를 대학에 정말 보내주겠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일남이는 절간 같은 관저에서 학교는커녕 외출금지라는 규율에 몸살을 앓으며, 운전사들에게 뢰물을 바치고 시내로 몰래 빠져나가는, 골칫거리로 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김정일도 나에게 “평양에 있는 국제관계대학 같은 곳에 다녀라.”라고 말했다. 국제관계대학은 어떻게 보면 김일성종합대학보다 간부급들이 다니는 곳이다. 대충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 갔는데, 별다른 소식이 없자 엄마가 크게 실망했다.



성혜랑 : 일남아, 벌써 몇 개월째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이걸 어떻게 하니?



일남 : 엄마, 걱정 마. 9월에는 대학에 보내주실 거야.



성혜랑 : 그렇겠지. 꼭 보내주시겠지.



일남 : 꼭 보내주실거야. 엄마, 나두 밤에 서평양 경기장 재건축 하는데 나가서 일할까? 지금 입당 준비하는 애들은 다 거기 가서 일하고 있어.



성혜랑 : 지도자 동지께서 승인 안 해주실거야. 외부에 나가려 그런다구 야단이나 맞을걸.



일남 : 인민군 추모탑에 올라가면, 건설대학 애들이 올라와서 시험준비 하느라고, 여기 저기 나무 밑에 앉아서 공부하는데, 그 애들 보면 나두 빨리 공부하고 싶어.



막판에 나도 외국으로 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김정일이 나를 대중 앞에 내놓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나를 사회로 내보내는 게 안 되겠다 싶은 것 같았다.



해설 : 이런 속사정과 함께, 당시 김정일의 기분이 몹시 좋았던 점도 리일남의 스위스 류학을 승인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성혜랑은 김정일이 새 녀자에게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1981년에 태여난 김정일의 둘째 아들 ‘김정철’로 추정된다. 성혜랑의 이야기다.



성혜랑 : 그 해 여름 애들이 다 나왔을 때 그는 대단히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가 새 녀자에게서 아들을 낳은 예감이 들었다. 후에 정말 그때 내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기분이 좋았던 그는 일남이를 대학에 못 보내준 대신 제네바에 데리고 가 공부시키라는 허락을 내렸다.



김정일 : 정남이는 모스끄바에서 공부를 하면 되고, 일남이는 제네바에 가서 어학연수를 하라. 2년 정도 어학연수를 마치고 나서 그 다음에 뭘 할지 생각해보자.



리일남 : 정말입니까? 지도자 동지!



김정일 : 그럼, 정말이구 말구. 하지만 그대신 공부 열심히 해야 돼?



리일남 : 네. 알겠습니다.



김정일 : 자, 빠빠가 공부 잘 하라고 주는 선물이니까,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돌아오라.



리일남 감사합니다. 지도자 동지.



김정일은 로렉스시계를 직접 채워줬다. 시계 뒤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탄생 예순돐 기념’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김일성의 환갑은 72년 4월 15일, 선물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10년 된 시계를 꺼내다가 직접 채워주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 모스끄바에 가던 76년에도 김정일은 공부 잘 하라고 최고급 금촉 만년필과 원주필 묶음, 카메라를 선물로 주었다.



82년 9월 초 나는 일행과 같이 모스끄바에 나갔다. 정남이와 남옥이는 모스끄바에 남고, 나는 열흘 정도 바빌로바에 있다가 리철 제네바 주재 대표공사를 따라 제네바로 갔다. 9월 20일경이었다. 마지막 제네바행이었고, 그리고 가족과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제네바 근교 클로벨몽의 정남이 저택에 짐을 풀었다. 굉장한 고급아빠트의 4층 전체를 다 썼다. 나는 평양을 떠날 때 “제네바에 가면 반드시 미국에 한번 가보아야 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리철은 나를 어학학원에 수속해줬다. 사이트사우스인가,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 선생 한 명이 나를 가르치는 개인교수 형식이었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집에서 기차를 타고 세 정거장쯤에 있는 학원에 나갔다. 하루에 90분씩 그 선생과 1대1 수업을 받기로 하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같이 시작했다. 수업은 한 주일이나 했을 것이다. 9월 28일 튀었으니까.



해설 : 용케도 김정일의 승인을 받아 아들 일남과 함께 제네바까지 오게 된 성혜랑은, ‘내게도 이런 날도 있구나’하는 기쁨을 느꼈다. 김정남의 교육 문제 때문에 정작 자신의 아들은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 미안함이 풀리는 듯 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성혜랑은 나중에 자신의 수기에서 “그러나 도착한 지 불과 두 주일 만에 나는 엄청난 일, 그후 나의 생을 먹칠해 버린 사건을 당했다”고 고백한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