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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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부 자본주의 병에 걸린, 김정일의 처조카, 두 번째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내가 남조선 텔레비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관저에서 생활한 덕분이다. 일반 인민은 상상할 수도 없는 특권이었다. 주파수가 고정돼 있어 남조선 라지오도 시청할 수 없는 사회에서, 더욱이 남조선에서 나오는 그 무엇이라도 듣거나 보았을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통제구역으로 가야 하는 인민들이, 지도자 관저에서 재미로 남조선 텔레비죤을 본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펑범한 인민들만이 아니다. 호위사령부의 경호를 받는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간부 당원들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도자 관저에서 남조선 희극배우 리주일의 희극을 보며 웃고, 남조선 련속극을 보면서 비련의 주인공을 동정하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지금도 궁금하다. 하기야 안다 손 치더라도 아는 척도 해서는 안 되겠지만.



해설 : 200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반 인민들 속에서도 남조선의 련속극과 영화를 담은 알판이 유행했다. 이를 통해 남조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리일남은 이미 20년 전, 어린 나이에 이런 문화를 접했으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리일남이 남조선 문화를 접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계속 들어보자.



서울 생활 초기에 텔레비죤이 너무 화려해 인민들의 실생활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신문에서 읽은 일이 있다. 사실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특수한 사람들의 특수한 사랑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는 느낌도 받는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달동네>인지 정확한 제목은 잊었지만, 서민들의 기쁘고 슬픈 일을 그린 련속극도 많았다.



그리고 아무리 못 사는 서민들의 얘기라 해도 거기에는 사람들의 체취가 묻어 있었다. 구수한 인간의 모습이 있었다. 매일 속도전에 사회주의 대건설, ‘총동원, 앞으로’ 하는 돌격과 진군, 충성을 빼면 별다른 것이 없는 조선 텔레비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구수한 냄새가 없는 것만 보다가 인간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들의 태도가 그렇게 구수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진솔했다. 불만이 있으면 털어놓고,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우는 련속극의 모습이 항상 긴장해야 하는 조선의 생활과는 너무 차이가 났다.



내가 외국물을 안 먹고 평양 생활만 하다가 남조선 련속극을 봤다면,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사는 게 제대로의 삶인데, 사랑 때문에 눈물이나 짜고, 술 먹고 큰 소리 치는 모습은 혁명적 인간과는 거리가 먼 부르죠아의 잔재이거나 퇴영적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내가 서울에 와서 10여 년을 산 뒤의 것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느낌도 있지만, 남조선 련속극을 보고 기분 나빠하는 혁명적인 인간도 결국에 가서는 나와 같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 본연의 자세에 대한 갈구는 사는 곳이 남조선이든 북조선이든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선이 어느 정도 개방된다 해도 남조선 텔레비죤을 보게 하지 않을 것이란 예측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내가 김정일이라도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조선 주민들이 남조선 텔레비죤을 보게 되면, 보는 순간 지금까지 속아 살았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맨날 깡통만 뒤지고 미국 놈들이 먹다버린 꿀꿀이죽만 먹고, 거리에 나가면 거지와 창녀들만 우글거린다고 했는데, 그런 배움과는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 주민들의 봉기를 유도하려 한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른 그림은 필요없고, 서울 백화점 매대 하나만 보여줘도 될 것이다. 그걸 보는 순간 조선 인민들의 눈이 뒤집힐 것이기 때문이다.



남조선 텔레비죤과 영화를 자주보고 또 소설들을 읽다보니 남조선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많이 알게 됐다. 최소한 인민들이 알고 있는 남조선과는 전혀 다른 남조선을 알게 됐다.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었다. 특히 미국에는 꼭 가보고 싶었다. 남조선을 알게된 것처럼 영화나 문학작품을 통해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환상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 내 가슴속 깊이 자라게 됐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잘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인데 신대륙에 가면 꿈을 성취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런 나에게 어머니도 미국을 칭찬하셨다. 공식적으로는 ‘미제국주의’인데도 우리 모자간에는 그런 대화를 했다.



성혜랑 : 일남아, 알면 알수록 미국이란 나라는 정말 위대한 나라같다. 그렇지?



리일남 :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엄마, 쏘련이랑 비교해 봤을 때 어느 나라가 더 대단할까?



성혜랑 : 이건 내 생각인데, 미국은 쏘련과는 대비조차 할 수 없으만큼 굉장한 나라야.



리일남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혜랑 : 다른 것보다도, 두 나라의 문학이나 영화를 비교해보면 단번에 알 수 있지.



이모도 나에게 미국이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종종 말씀하셨다. 어머니나 혜림이모는 자기들의 기준에서 말씀하셨는데, 그 분들이 지나친 것은 내가 더 이상 어린 아이도 아니고, 나름대로 미국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미국이나 남조선 등 자본주의 나라에 가보고 싶다는 건 이런 여러 가지 복합된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경조성이 안 됐으면 나의 서울행은 불발에 그쳤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불발에 그칠 수도 있었다. 평양에 남아 공부할 뻔했기 때문이다.





해설 : 1982년 리일남은 모스끄바 유학생활을 마치고 평양에 돌아와 있었다. 대학을 가야 할 나이가 됐기 때문이지만, 6년간 외국물을 먹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단속 차원에서 불러들인 것이다. 하지만 리일남은 수개월동안 대학에 가지 못한 채 김정일의 관저에서 답답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노력과 리일남이 김정일에게 보낸 편지가 호감을 사서, 그해 9월 스위스로 떠나는 김정남를 따라 제네바로 류학을 떠나게 된다. 그로부터 2주 뒤 리일남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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