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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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다, 두번째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자본주의 국가로서 처음 가본 나라는 오지리였다. 모스끄바에서 놀라고 체스꼬 프라하에서 더욱 놀란 나는 오지리 빈에 가서는 완전히 까무라쳤다. 오지리는 체스꼬와는 비교가 안 되는 나라였다. 건물은 비슷하지만 백화점이나 식당 등 모든 체계가 사회주의 국가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믿어 의심치 않던 내게 오지리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오지리의 빈에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알게 되였고, 그때부터 1년에 두 번씩은 꼭 찾아 갔다.



오지리 련락부 주재원 리상준이 안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리상준에게 통보를 하지 않고 유고슬라비아 친구 안드레이하고 빈에 가기도 했다. 그냥 호텔에 묵으면서 무도장도 가보고, 여러 술집도 다녔다. 녀자들이 가슴을 드러내놓고 술 심부름을 하는 토플리스라는 술집에도 가봤다. 이곳에서 자본주의 나라는, 배운 대로 돈만 있으면 사람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빈의 슈트라우스공원에도 가봤다. 저녁이 되면 흘러나오는 왈쯔에 맞춰 수십 쌍의 시민들이 춤을 추고, 구경나온 사람들도 같이 춤을 추었다. 참 인상 깊었다. 그렇게 낭만적이고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리일남 : (혼잣말) 자본주의 나라 인민들은 저렇게 자유롭게 사는데 우리 공화국은 참 한심하구나. 그나마 나는 관저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이렇게 즐기면서 다닐 수 도 있는데, 우리나라 인민들은 정말 불쌍하다.



물론 이런 생각을 누구에게도 내보이지는 못하고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다.



빈에서 차를 타고 구룬딩이라는 포도주 산지도 가보았다. 몇 km를 달려도 포도밭만 있는 그곳에서는, 내가 마침 그런 시기에 간 탓인지 저녁마다 포도주 축제를 열었다. 민속의상을 입은 악사들이 왈쯔를 연주하면 포도주를 마시던 마을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즐거워하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물론 그런 행사가 마을의 수익을 위한 관광객 상대의 상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장삿속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자유가 있고, 이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런 행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일의 처조카로서 누구보다 앞장서 공화국을 보위해야 할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스스로를 꾸짖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움트는 ‘반동적인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해설 : 김정일 독재집단이 외부소식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리유를 리일남이 잘 보여주고 있다. 북조선에서는 자본주의 나라들에 대해 환상을 갖지 말라고 늘 선전하고 있는데, 한번이라도 외국의 현실을 목격하면 모든 선전이 무력화되고 만다. 김정일이 인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식주에 아무 부러움 없는 내가 자본주의의 맛을 본 순간 ‘이런 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외교관들이나 특히 인민들이 와서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도 머리에 떠올랐다. 외교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공화국의 충실한 전사를 만들기 위한 교육목적이 있겠지만, 인질로 잡아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두렵고 미웠다.



남조선 서울에 와서 대학에 다닐 때 남조선의 일부 학생들이 인민들의 물질 생활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사회주의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사회란 돼지들이 모여 경제 생활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도 들었다. 당시 나는 내 얘기를 할 형편도 못됐고, 또 솔직히 말해 그런 토론에 끼고 싶은 생각도 없어 모른 체 했지만, 내 경우가 생각났다.



해설 : 리일남은 남조선에 망명한 이후 1984년부터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를 다녔다. 당시 남조선의 대학들에는 사회주의 리론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독재에 대한 반감과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가혹한 탄압이 계속되자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게 된 것이다. 하지만 리론을 알았을 뿐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실은 잘 몰랐다. 사회주의의 모순을 체험한 리일남으로서는 답답했을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 나라에 와서 풍부한 물건에 눈이 뒤집힌 ‘거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인 갖지 못한 자의 소외도 배워 알고 있었다. 독재자의 인척이 무엇이 부족할까. 당시 나는 현재 남조선에서 웬만큼 산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화려하고 풍부한 생활을 했다.

그때 내 생각이 론리적으로 리론화됐다거나 신념화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내가 배운 사회주의, 특히 주체의 나라 조선이 가르치는 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회란 돼지들이 모여 경제 생활만 하는 곳이 아님은 분명하다. 인간이 먹는 것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삶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국가는 역시 국가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당시는 나도 내 생각을 잘 몰랐지만, 사고의 밑뿌리부터 뒤흔드는 변화가 온 것은 분명했다.



빈에 처음 갔다왔을 때 혜림이모가 소감을 물은 적이 있었다.



성혜림 : 얘! 일남아! 그래 자본주의 나라에 가보니 어떻든? 재미있었니? 좋은 거 많이 사왔어?



리일남 : 좋던데요.



이모는 나를 아이 취급하며 질문을 많이 했지만, 이모 앞에서 환상적이였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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