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남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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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부 다시 모스끄바 생활을 추억하며

리일남 수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07 01:23




혜림 이모가 처음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는 모스끄바 주재 대사가 권희경이었다. 중간에 김재봉 대사가 부임했다가, 외교부 부부장을 지낸 권희경 대사가 다시 부임해서 82년 내가 모스끄바를 떠날 때까지 있었다. 권 대사는 그 후 당 조사부장이 되었다고 한다. 굉장히 출세한 것이다.



해설 : 리일남은 1976년 5월에 이모 성혜림을 따라 모스끄 바에 도착했다. 류학을 온 것이지만 기본 임무는 신경병으로 요양을 온 성혜림을 돌보는 것이였다. 이때 모스끄바 대사가 권희경이였는데 권희경은 1972년 쏘련 대사로 부임했다가 76년에 해임된 후 다시 80년부터 89년까지 쏘련 대사로 근무했다. 1990년부터는 당 중앙위 대외정보조사부 부장 즉 현재의 35호실 부장으로 승진했다.



권 대사는 대개 한 주일에 한 번씩 이모에게 병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 식사를 하고 가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올 때마다 선물을 들고 왔다. 가끔은 딸라를 들고 왔는데, 직접 드리기는 쑥스러우니까 이모 보좌관인 최준덕을 통해서 드렸다. 권 대사는 자주 우리를 대사관저로 초청해 식사대접을 했다.



하루는 대사관 최준덕의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대사관에서 최준덕의 사무실을 넓혀 이모가 대사관에 오면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도록 휴게실과 침실을 꾸며놨다고 한다. 나는 이모가 너무 심하게 발작을 부릴 때면 그곳으로 피난가기도 했다. 밥은 대사 료리사가 해줬다.



78년 나는 3층의 이모 방 옆을 떠나 2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3층을 쓰면 이모와 다투기도 하는 등 불편했기 때문이다. 밥 먹을 때는 3층에 올라가 이모와 같이 먹었다. 내가 방을 옮긴 것은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이모의 발작을 나 혼자 받아내기 어려웠고, 또 그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와의 생활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리해가 안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모의 질환이 심할 때는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 짜증을 그대로 받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좀 더 잘 해드리지 못해 후회가 가슴을 치지만, 당시 10대 후반의 나로서는 이모가 미울 때도 있었고, 이모 곁을 떠나 나 혼자 훨훨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곁을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방만 한층 밑으로 옮긴 것이다.



해설 : 70년대 후반은 성혜림의 신경병이 가장 심할 때다. 당시 성혜림은 조금만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신경질을 내며 발작을 부리곤 했다고 한다. 언니 성혜랑의 수기를 잠시 살펴보자.



성혜랑 : 1978년이었다. 지도자는 나에게 모스끄바를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때 혜림의 병이 제일 심할 때였다. 혜림은 병이 심해 밤마다 구급차가 와서 독한 주사를 놓아줘도 자지 못했다. 불안발작이라는 차마 볼 수 없는 신경병은 본인의 고통도 형언키 힘들다지만 곁에서 보기도 괴로웠다. 일남이는 하루 한 번 코 끝도 볼 수 없었다. 뒤골방에 처박혀 나타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밥을 먹는지도 모르게 이모를 피해 숨어 다녔다.



당시 이모의 심기를 건드리면 큰일이 났다. 조명호 대사관 당 비서가 이모한테 걸려서 혼쭐이 난 적도 있다. 사실 조 비서는 좀 ‘얼빤’ 한 데가 있다. 조 비서가 무슨 일을 처리했는데, 잘못해서 이모에게 욕을 먹은 모양이다. 그후 조명호 비서가 대사에게 “옛날 영화배우 하던 게 지위가 좀 높아졌다고 사람을 깔보고 욕한다.”고 불평을 했고, 마침 옆에 있던 대사관 정치보위부 책임자가 듣고 내게 알려줬다. 괘씸하게 생각돼 이모에게 일러바쳤다. 이모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조명호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명호 : 예. 조명호 전화 받습니다.



성혜림 : 조 동무, 당장 평양으로 짐 싸들고 나가시오!



조명호 : 녀사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혜림 : 당장 평양으로 가란 말이야. 이틀 내로 안 떠나면 총살할거야!



조 비서가 헐레벌떡 이모가 있는 아빠트로 달려와 무릎 끓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조 비서는 겨우 용서를 받았다.



대사에게도 뭔가가 마음에 안 들면 이모는 “당장 짐 싸들고 평양으로 나가라.”고 하셨다. 이모가 김정일에게 한 마디만 하면 이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이모는 아픈 상태로 언제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었다. 대사관 사람들은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해설 : 당시 김정일은 김영숙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고영희와도 살림을 차렸지만 성혜림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성혜림이 장남을 낳기도 했지만, 첫 녀자였기 때문에 애틋한 정이 있었던 것 같다. 김정일은 성혜림이 봉화진료소에 입원 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기도 했고, 모스끄바로 떠날 때면 수행원들을 비롯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때문에 쏘련 대사관 성원들은 성혜림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모와 관련된 일체의 사항은 대사관의 국가정치보위부 담당 대표 소관이었다. 국가정치보위부에서도 모스끄바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었는데, 대좌인 모스끄바 주재 정치보위부 대표는 전 유럽을 관장하고 이었다.



그 사람도 이모와 관련된 사항 중 평양에 보고할 것이 있으면 먼저 최준덕에게 이러이러한 것을 보고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모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도 최준덕에게 먼저 물어보고 최준덕이 보고하지 말라고 하면 보고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모스끄바 대사관은 우리에게 꼼짝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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