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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3화 여성백과 여기 있습니다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아들을 잃은 뒤 나는 동평양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 집에서 아들과 함께 지낸 시간들이 되살아나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정남이 유희장 뒤에 있는 골방소파에서 자면서 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보기 딱했던 관리원들이 자기네 방을 하나 내고 내 방으로 꾸려주었다. 그들은 자식들을 다 유자녀학원에 보내고 언제나 그리움을 숨기며 앓고 있는 ‘슬픈 어미’들이었다.



나는 그때 아들이 없어진 사실을 어머니와 혜림에게 숨기고 있었다. 김정일 비서가 군사대학에 보내주어 만경대 군사대학에 있다고 이것도 김정일 비서와 공약을 하고 있었다. 이 약속을 그는 6년이나 지켜주었다. 혜림의 병도 병이려니와 이런 무서운 실수를 저지른 나를 혜림으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그는 나의 청을 들어준 것이다.



혜림의 불안발작이라는 신경병은 옆의 사람을 못살게 구는 히스테리를 동반했다. 생트집을 잡고 만만한 어머니와 나를 들볶기 일쑤였다. 김정일 비서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82년 9월 이래 나는 모스크바에 머물지 않았다. 예민한 혜림이가 내 얼굴만 보아도 무슨 일이 있다는 기미를 알아챌 것이므로 그간 평양을 왕래할 때조차도 오고가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도 남옥이도 만날 수없이...



평양집 관저 뒤 복도 맨 끝 방에서 집을 지키는 ‘수녀’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김정일 비서는 이미 그 집을 떠나고 언제 들를지 그가 빈 집에 올 리도 없어 집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잠결에 나는 분명 징-하는 신호를 들었다. 관리원 방에는 다 신호판이 있다. 정일비서나 정남이가 관리원을 부를 때 방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모든 관리원 소재지에 있는 신호판에 불이 켜진다. 어디서 찾는다는 장소가 알려지는 것이다.



신호판 서재에 불이 켜졌다. 이것은 서재에 김정일 비서가 들어와서 관리원을 찾는 것이다. 새벽3시였다. 나는 잠옷을 갈아입고 대기했다. 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계단에서 발을 삐어 깁스를 하고 있었다.



관리원: “이모, 선생님 들어오셨습니다. 이모 찾으십니다.”



나는 관리원에게 부축되어 깨끔발로 그의 서재 문 앞에 가서 인사를 했다. 82년 9월 아이를 잃은 이래 처음이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명랑하게 “발은 왜 그렇게 됐소?”하고 물었다. 뒤 복도 계단에서 삐었다고 하니 고작 2개있는 계단에서 그랬는가? 하고 또 묻는다. 그는 원래 대강이란게 없었다. 끝까지 명쾌하고 알고 마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밤에 약을 먹으러 식당에 물을 가지러 가는데 안경을 안 끼고 가다가 헛디뎠다고 자세히 말했다. 그제야 내가 안경을 안 끼고 자다 나온 것을 보고 “이모 안경 갔다 줘라.”하며 관리원에게 시켰다.



김정일: “우리집에 저쪽에서 낸 여성백과가 있소?”

나는 있다고 대답했다.



김정일: “어디 있소? 동평양에? 여기 있소?”



나는 “여기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나는 안경을 받아끼고 바로 그의 서재 뒷벽 서가 왼쪽 맨 끝에 있는 여성백과를 가리켰다. 그는 대만족이었다. 만족할 때 그의 표정은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관리원이 사다리를 놓고 내릴 동안 올려다보며 그는



김정일: “최은희가 여자의상 견본을 보겠다고 여성백과를 찾는데 됐소, 됐소.”



그는 이런 책까지 마련해놓은 할머니의 치밀한 도서구입에 만족했고 주머니에 있듯이 내뵈는 나의 즉각적인 대답도 기호에 맞아 둥둥 떴다.



그가 나에게 “찾아보지, 거기 여자저고리 견본이래.”하고 말했다. 그런 것이 있었다. 정일비서는 책을 ‘차에 내다 실어라’며 관리원에게 시켰다.



며칠 후였는지 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 이광수 전집을 찾았다. 신상옥이 영화하면서 찾는데 학습당에도 없고 김대 도서관에도 없다고 해 우리 집에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책을 찾아주니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나 한 듯 기뻐했다.



그러고 보니 이때가 아들을 잃은 후 처음으로 그 사람과 상면한 날들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이것을 잊고 있었다. 지도자는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나를 대해줬다. 정말 그가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큰 정치적 사고를 저지른 나를 용서한 근거가 무엇인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정치적 손실보다 더 윗자리에 놓은 게 아닌지. 그는 정치성보다 인간성을 더 좋아했다.



해설: 이것은 성혜랑의 착각이다. 김정일은 탈북자들의 가족은 사돈의 팔촌까지 수용소로 보내버리고 자신의 반대파는 가차 없이 숙청해버리는 잔인한 사람이다. 김정일은 인간성보다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정치성을 더 중시한다.



어머니가 관저에 들어오신 후 첫 번째로 착안하신 것은 관저의 장서를 꾸미는 일이었다. 그는 쾌히 승낙하셨다. 10년 동안 지도자는 분기마다 일본과 남조선의 출판목록을 정상적으로 들여왔다. 자기의 차에 싣고 들어와 한아름씩 안고 현관서부터 “할머니! 할머니!”하고 어머니를 찾곤 했다.



어머니는 출판목록을 샅샅이 뒤져 철학, 역사, 사상, 교양, 문학, 예술, 미술 사전류, 위인전집 어린이 독서물과 청소년 교양서들, 학과 참고서들을 뽑으셨다. 한문으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집에서 그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 한분이셨다.



책이 들어올 때는 수십지함씩 들어왔다. 어머니가 밤에 분류해서 서가에 꽂을 위치를 정하실수 있게 관리원들이 대 응접실에 빼곡이 책을 정열 시켜 놓는다. 정남이를 재워놓고 어머니는 그 책 바다를 왔다 갔다 하시며 위치를 정해주셨다. 아무리 늦어도 일을 끝내기 전에는 주무시지 않으셨다. 대강이라는게 없었다. 단 한권도 잘못 꽂지 않게 지시를 하시고 잘못 꽂힌 곳은 시정하셨다. 대응접실, 유희장, 오락장, 훤한 벽마다 책이 가득 채워졌다. 이 책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집 안에서 속 빈 껍데기로 질식했을 것이다.



이 책들 때문에 김정일 비서가 자기 아버지 앞에 ‘기쁨을 드린’ 일을 내가 목격했다. 연도를 잊었다. 독일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가 처음 북조선에 온다는 소문이 있을 때 인데 수령님은 아들에게 루이제 린저의 책이 우리나라에 있는가 물었다. 학습당이나 비공개 도서실에도 없었다. 지도자는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김정일: 할머니 루이제 린저 책이 학습당에도 없고 비공개 도서실에도 없는데, 혹시 우리집에 있어요?



할머니: 네 있습니다. 전집이 있습니다.



김정일: 하하, 그래요. 정말 잘 됐습니다. 내 곧 갈테니 준비좀 해주시라요.



그는 효성이 지극했고 자기 아버지를 우러르고 있었다. 그는 루이제 린저 전집을 자기 아버지께 보냈다. 수령님은 그녀의 책을 미리 본 다음 그 작가를 만났다.



5.25교시 이후 외국도서 반입이 엄금되어 책은커녕 린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드물던 때였다. 루이제 린저와 수령님과의 친분이 한동안 지속되고 그녀는 북조선에 대해 수령님에 대해 좋은 글을 썼다.



해설: 조선은 5.25교시이후 ‘도서정리사업’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책과 잡지는 철저한 검열을 거쳤다. 그러면서도 김정일 자신의 집에는 남조선의 책은 물론이고 세계각지에서 책을 들여왔던 것이다. 게다가 인민들에게는 남조선 출판물이나 록화물을 못 보게 하면서 자신의 관저에는 남조선 텔레비죤방송은 물론이고 일본 방송 등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김정일은 모든 정보를 독점하면서 인민들의 눈과 귀는 막아놓고 있다.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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