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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0화 김정일의 여자들 / 아버지의 죽음

등나무집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8-16 17:29




정일비서는 지금은 고영희와 살고있다. 그와는 현재도 앞으로도 김정일 비서와 가정을 고수할지 모르나 ‘째포’라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고 있다. 이것은 지도자에게 백두산 성지에서 태어난 혁명가계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거부감을 주고 있다. 그를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혜림은 맏아들의 어머니일 뿐 지금은 떠나간 존재이다.



언제인가 나는 어머니와 한담을 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앞으로 정남이 빠빠 수반이 되면 누굴 데리고 나설까?”하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누이를 데리고 나설망정 어느 여자도 못 내놓을 걸. 고영희를 내놓겠니, 서장동 김영숙을 내놓겠니.”하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해설: 잠시 고영희에 대한 리일남의 증언을 듣고 가자.



이일남 : 고영희는 북송재일교포 출신인데 어린나이에 부모를 따라 북으로 왔다고 한다. 그녀는 측근자파티의 무용수출신이다. 김정일은 1976년부터 고영희를 들어앉혔다고 한다. 77년부터는 파티에도 참석시키지 않았는데 당시 어디에다 살림을 차렸는지는 모른다. 나중에 창광산 관저를 고영희에게 주었는데 그때 고영희가 임신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고영희는 81년에 아들 정철을 낳았다.



해설: 고영희는 이후 아들과 딸을 더 낳았고 2002년 암으로 사망했다.



김정일비서는 내심 그 어느 여자와도 정식결혼하지 않았다. 외부에서 김영숙을 정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 앞에 합법화된 여자라는 의미 외에는 없다. 가계는 공민증도 없다. 그 어떤 법적 수속도 문서도 없는 것이다.



누구를 아내로 인정하는 가는 법위에 군림한 최고 수반 자신의 인정 외에는 없다.



해설: 김정일에게는 성혜림 외에도 3명의 여자가 더 있다. 김일성이 정해준 중앙당 타자수 출신의 김영숙, 재일교포출신 무용수였던 고영희, 그리고 현재 김옥이라는 여자가 있다. 이 외에도 ‘무슨무슨 댁’으로 불리는 여자가 몇 명 더 있다고 한다.



내 아버지는 그때 창광산 기슭에 있는 외딴집에서 식모의 도움으로 혼자살고 계셨다. 나는 자주가지 못해도 운전사를 매일 한번씩 보냈다.



‘할아버지께서 불편해 하신다’고 하여 가보니 아버지는 심장부근이 따끔거린다고 호소하셨다. 적십자병원 심장연구소로 모시고 가면서 큰명절이 시작되는데 교통차단이 될 수 있으니 며칠간 입원하고 계시는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때가 1982년 4월 15일 수령탄생 70주년 즈음이었다.



거실을 나서면서 아버지께서는 방을 한번 휘둘러보더니 창턱에 활짝 핀 홍초를 안아다 수령님 초상화 밑에 놓았다.



아버지는 “4.15까지 피게 가꾸었더니 정말 때맞춰 피었구나.”하시며 초상화와 홍초를 다시 한번 번갈아 보았다. 또 “큰 명절을 비우네...”하며 아쉬워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수령님을 받들고 있다는데 놀랐다. 아버지는 당신이 천대받고 짓눌렸던 지난날을 다 소화하고 있었는지 1947년 처음 만났을때 받아안은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인상을 무엇으로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의 ‘영웅숭배정신’은 그때 북조선을 휩쓸고 있던 김일성 개인숭배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사상교양에 의해 이룩된 개인숭배였으나 나의 아버지는 남의 주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뭐니뭐니해도 그 양반은 애국자이고 위대한 정치가다’라는 확고부동한 견해를 끝까지 가지고 계셨다.



12일날 저녁에 입원하신 아버지는 13일 새벽 심근경색으로 운명하셨다. 78세였다.



10년동안 혜림이를 못봤다고 애원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노여움과 비애가 달아올랐다. 관저에 들어간지 12년동안 사실 아버진 어머니도 2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울타리안에서 산 우리의 생활을 무슨 말로 어떻게 집약할지 모르겠다. 김정일 비서의 관저에서의 우리 생활은 아버지를 만나러 찾아갈 수없게 했으며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권력의 세계에는 인내와 인종의 시간만이 흘렀다.



아버지는 이렇게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많은 추억을 놓쳤다. 떠오르는 아버지와의 대화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니 여기와 보래”하며 아버지가 나를 부르신다. 아버지 방은 인민군 거리 대통로로 창이 나있었다. 김일성광장으로 대학생들이 열을 지어 길을 메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얏뜨라! 대단하다.”하고 탄성을 지르셨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에 감탄하는지 얼른 몰랐다.



아버지는 “니 아나? 저 애들이 다 우산을 쓴 기라. 꼭 같은 교복에... 옛날 조선사람들이 우비쓰고 다닌줄 아나. 더구나 젊은 애들... 우비가 다 뭐꼬... 대단하다, 대단해... 전체인민의 빈부차를 없앤다는 기 보통일인줄 아나...”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이 마지막 말은 마르크스주의 100년 강의보다도 더 깊이 내 가슴에 박혔다. 빈부의 차, 20세기가 해결 못하고 새천년에 떠넘기는 기본모순, 자본주의가 이토록 쾌재를 불러도 이 약점을 감추지 못하는 인류의 기본문제를 우리 아버지는 평생 포착하고 계셨다.



해설: 성혜랑의 아버지 성유경은 경상남도 창녕의 만석꾼집 아들이었다. 그는 일본유학생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해 남로당에 입당했다. 성유경은 1947년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도 했다. 이후 월북한 성유경은 북조선의 사회주의를 위해 헌신했지만 남쪽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남쪽 출신 인사들 대부분은 숙청됐다. 성유경과 그의 동지들이 이루고자 했던 ‘인민을 위한 나라’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지금의 북조선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김정일의 1인 절대체제로 변질됐다.



아, 아버지...김장군을 만나러 갈 때 사선에서 손수 노어사전을 구입해 지어 나르시던 아버지. 누가 아버지를 알아주었던가... 누가 아버지를 아껴드렸던가.



아버지는 평소 “제대로 안해서 그렇지, 뭐라캐도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나은 사회야.” 하시며 “지하나 잘먹고 잘살겠다고 아득바득 하는게 무슨 인생이고... 물질과 권세에 초연해라.”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자기 신조대로 살다 가셨다.



혜림은 곧잘 이런 말을 했다. “얘, 아버진 철인이야.”



그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적인 선택을 한 내 동생 혜림이를 나는 존중한다.



등나무집, “산산히 흩어진 이름이여...”







원작: 성혜랑

극본: 최수연, 리유정

연출: 박은수, 남유진

낭독: 최연수, 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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