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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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무너진 베를린 장벽

개혁개방의 기적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7-28 15:20




1989년 11월 9일, 독일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동서 랭전의 가장 큰 상징이였던 베를린 장벽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게 될 것이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11월 9일, 동부독일 공산당은 해외 려행 간소화 조치를 발표한다. 려행을 자유롭게 해달라는 인민들의 요구가 여름부터 시작돼 가을까지 계속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표된 조치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서부독일을 통해 해외 려행을 갈 수 있도록 입국사증 발급절차를 단축시키겠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휴가를 다녀온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권커 샤보브스키가 이번 조치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발표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샤보브스키가 해외려행에 관한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것을 발표하자 외국 언론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이때 한 이딸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려행자유화조치가 리행되는지 물었다. 샤보브스키는 정신없이 문건을 뒤적이다 ‘지금부터 바로’라고 답변했다. 독일어에 서툰 이딸리아 기자는 이 말을 확대 해석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기사를 타전했다. 다른 외국 기자들도 덩달아 동부독일 당국이 베를린 장벽 통과를 무조건 허용하기로 했다는 잘못된 기사를 썼다. 그러자 이날 밤 서부독일 방송들이 이들 언론들의 기사를 인용하며 동부독일이 드디어 국경을 개방하기로 했다는 보도를 일제히 내보냈다. 해외려행 간소화 조치가 국경개방으로 둔갑된 것으로, 이것은 명백한 오보, 틀린 보도였다.



그런데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소식을 접한 수만 명의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의 출입문인 브란덴부르그 앞으로 몰려와 닫힌 문을 열라고 요구했다.



당황한 것은 국경경비대였다. 상부로부터 아무런 련락을 받지 못한 국경경비대는 몰려든 인민들에게 해산을 요구했다.



(삽입 - 국경경비대 해산명령)

“모두 돌아가십시오. 지금 국경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해산하지 않으면 모두 처벌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해산을 요구하는 국경경비대에 방송을 보지 못했냐고 거세게 항의를 하며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당황한 국경경비대는 대혼란에 빠졌다. 발포를 해서라도 인민들을 해산시켜야 하는지를 놓고 치렬한 토론을 벌리는 사이, 문을 열라는 인민들의 수자는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결국 인민들의 힘에 눌린 국경경비대는 상부의 지시도 받지 않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개방해 사람들을 그냥 통과시켜야 했다.



몇몇 인민들은 아예 베를린 장벽을 올라타 넘어가기 시작했고 흥분한 일부 청년들이 어디선가 도끼와 망치를 들고 나와 아예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철옹성 같았던 베를린 장벽이 한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20세기를 뒤흔든 자유세계와 공산주의의 대결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부독일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몰락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쏘련은 독일과 수도인 베를린을 4곳으로 분할했다. 이후 자유진영인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지역에서 서부독일이 세워졌고 공산진영인 쏘련이 차지한 지역에선 공산주의 동부독일이 건설됐다.



문제는 수도인 베를린이였다. 동부독일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베를린이었지만 자유진영이 통치하였던 서부베를린은 서부독일에 속했고 반대쪽 동부베를린은 동부독일에 속해 있었다. 공산주의 동부독일 한 가운데 서부독일의 땅인 서부베를린이 외딴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쏘련은 처음에 서부베를린과의 경계선에 작은 나무 울타리를 쳤다. 하지만 동부베를린 시민들이 허술한 울타리를 넘어 서부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설치하고 무장한 경비 병력을 배치해 인민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쏘련군의 발포에도 인민들은 자유진영인 서부베를린으로의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1961년까지 무려 350만 명의 인민들이 목숨을 걸고 서부베를린으로 탈출한다.



결국 1961년 8월 13일 동부독일은 서부베를린 주위에 높은 장벽을 세워 완전히 고립시키기로 결정한다. 서부독일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5천명의 국경경비대와 5천명의 경찰, 그리고 4500명의 인부들이 동원돼 167.8km에 달하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그러나 인민들의 탈출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뒤에도 계속됐다. 불과 사흘 뒤인 8월 17일 장벽을 넘던 페터 페히터란 청년이 총에 맞아 숨졌다. 1989년까지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죽은 사람만 1,200여명이고 붙잡힌 사람은 6만 명이 넘었다.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5천여 명에 불과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베를린 장벽이 단 하루 만에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동부독일과 서부독일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분단됐지만 40여년이 지난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1990년 통일 당시 동부독일의 국민총생산은 서부독일의 8.3%에 불과했다. 수출은 서부독일의 4.1%에 그쳐 동부독일의 경제는 분단을 계기로 사실상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난과 독재에 인민들은 지쳐 있었다. 반면에 서부독일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내 유럽의 선진국가로 우뚝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동부독일의 인민들은 서부독일로의 탈출과 통일을 꿈꾸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쏘련의 꼬르바쵸브 서기장이 개혁과 개방에 나서며 동구라파 나라들에 대한 불개입방침을 밝혔다. 1989년엔 웽그리아와 뽈스까, 체스꼬 등 이웃나라들에서 민주화혁명이 시작됐다. 동구사회주의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동부독일 인민들도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라이프찌히에선 매주 월요일 수십에서 수백 명 규모의 작은 시위가 열렸다. 10월 7일 동부독일 탄생 40주년엔 그 수가 라이프찌히에서만 7만 명,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인민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상당수 당 간부들과 지도자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개혁을 거부한 호네케르 서기장이 사임을 하고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됐다. 하지만 이미 공산당 지도부는 개혁을 추진할 능력이 없었다.



이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폰 바이체커 당시 서부독일 대통령의 증언이다.



(삽입 - 폰 바이체커)

“당시 저는 독일 남부를 방문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라지오를 통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몇 주 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감을 했습니다. 4주 전 7만 명이 모인 라이프찌히의 시위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웽그리아와 뽈스까 등을 통해 이미 서부독일로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부독일 공산당의 몰락을 의미했다. 얼마 뒤인 12월 3일 동부독일 공산당은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을 스스로 해체하고 이듬해 3월 18일에는 동부독일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됐다. 이어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달성한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통일이었다.



지금까지 개혁개방의 기적 제20부 ‘무너진 베를린 장벽’ 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21부 ‘독일 통일 그 이후’ 편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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