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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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부 변화하는 윁남 공산당

개혁개방의 기적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7-28 15:20




2010년 2월 2일 아침 윁남의 수도 하노이, 윁남 공산당 창립 80돐을 기념한 성대한 기념행사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농득마인 서기장과 응우옌민찌엣을 비롯한 윁남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농득마인 서기장은 연설에서 지난 80년 간 윁남 공산당의 력사를 언급하며 혁명 승리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락후한 나라 중 하나였던 윁남이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통해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을 이룩한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한 잘 사는 나라를 위한 현대화, 공업화, 강대국, 문명한 나라 건설을 위한 혁명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며 윁남 공산당과 국민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음악 전환>



윁남이 달라지고 있다. 세계적 기업들이 윁남에 투자하기 위해 몰려들고 하루가 다르게 높은 건물과 공장이 지어지고 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민생활도 풍요로워 지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윁남 공산당이 있다.



<전쟁 효과음>



윁남 공산당의 력사는 투쟁과 전쟁의 력사다. 1930년 호지명 주석에 의해 결성된 윁남 공산당은 프랑스의 식민지배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윁남 인민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으로 독립을 쟁취했지만 조선과 마찬가지로 북과 남으로 갈라지는 분단의 아픔도 겪었다. 윁남 공산당은 프랑스와 세계 최대의 강대국인 미국에 맞서 처절한 전쟁을 벌린 끝에 1975년 결국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윁남 공산당은 그 여세를 몰아 집단농장제를 실시하는 등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실시한다.



<음악 전환>



그러나 10년 뒤 윁남공산당은 자신들의 로선을 스스로 버렸다. 1986년 제6자 당대회에서 윁남 공산당은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 정책을 공식 선언한다. 사회주의사회 건설을 위해 수백만의 희생을 무릅쓰고 전쟁까지 치렀던 윁남 공산당이 사회주의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윁남은 한 해에 여러 번 농사가 가능한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집단농장 제도는 최악의 식량난을 가져왔다. 공업분야도 점차 엉망이 돼 나라는 갈수록 가난해졌다. 자신들이 추구한 노선이 잘못됐다는 것이 립증되자 윁남은 과감하게 사회주의 노선을 버렸다.



<음악 전환>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노선을 전환하기까지 윁남 공산당 지도부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회주의 경제가 명백히 실패라는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더 이상 기존 로선을 고집하는 것은 인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로선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제 공산주의 력사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로선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개혁개방에 나선 례는 많지 않다. 중국도 극심한 권력투쟁 끝에 모택동이 사망하고 개혁파인 등소평이 권력을 잡으면서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음악 전환>



그러나 윁남에는 호지명의 실용정신이 있었다. 윁남 공산당은 과감하게 자신들의 잘못된 로선을 인정했다. 경제정책 실패에 따라 기존 지도부가 모두 퇴진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꾸려 개혁개방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인민생활 향상을 위해 시장경제를 과감히 도입하고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에 대한 소유권은 농민들에게 주었다. 경제발전을 위해 나라의 문도 활짝 열었다. 십 수 년 전까지 치렬한 전쟁을 벌렸던 미국과 남조선, 령토분쟁을 벌린 중국과도 손을 잡았다.



(윁남 공산당 리념문화국 부국장 다오주이 꾸엇의 말입니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적극적으로 손잡고 나아갈 것이며 친구가 될 것입니다."



개혁개방을 위해 윁남 공산당 내부 개혁에도 착수했다. 당 지도부가 새로운 지도부를 지명하는 방식을 버리고 당 내부 의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지도부를 뽑았다. 이와 같은 변화로 독재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자본가들에게도 당을 개방했다. 2006년 10차 당대회에서 로동자, 농민의 당을 포기하고 자본가와 로동자가 함께 하는 당으로 변신했다. 2007년에는 당과 군대에서 운영하던 기업소들을 민간에 넘기는 개혁을 실시했다. 이전까지 군대나 당간부들의 손에 있던 손전화 회사와 은행, 호텔 등 100여 곳이 넘는 알짜 기업들이 인민들에게 넘어갔다. 윁남 공산당의 이러한 노력은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윁남에 대한 국제사회 나라들의 지원과 투자가 크게 늘어났다.



(호치민시 문화국장 투루옹 곡 투이의 말입니다.)

“도이모이, 즉 개혁개방 실시로 지금의 윁남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 있다. 농득마인 윁남 공산당 서기장과 응웬 밍 찌엣 윁남 주석이 그들이다. 2001년, 소수민족 출신의 가난한 목공이었던 농득마인이 당 서기장에 임명될 거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이전까지 당 서기장은 군대 출신이 맡아왔었다. 하지만 윁남 공산당은 개혁개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군대 출신보다는 개혁적이고 실용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 서기장에 취임한 농득마인은 경제발전을 부르짖었다.



“윁남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경제발전입니다.”



대외적인 역할은 주로 응웬 밍 찌엣 국가주석이 맡고 있다. 지난 2006년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찌엣 주석은 호지명시를 동남아시아의 경제중심도시로 성장시키는 등 윁남의 경제성장을 일군 주역이다. 청렴한 지도자로 인민들로부터도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해외로 탈출한 윁남 동포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한 것도 그의 작품이다. 당시 그는 이를 반대하는 당 원로들을 만나 리념의 포로가 되면 개혁개장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며 설득했다. 2007년에는 윁남의 국가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부쉬대통령과 수뇌회담을 갖기도 했다. 당시 방문에서 그는 윁남에 대한 국제사회의 투자를 적극 호소했다.



(응웬 밍 찌엣 윁남 주석입니다.)

“우리는 특히 세계 여러 나라와의 무역에 관심이 있습니다. 윁남은 앞으로 경제를 더 개방하고 세계 경제에 흡수될 것입니다.)



(음악 전환)



투쟁과 전쟁은 윁남 공산당의 력사 그 자체다. 하지만 변화하고 있는 지금의 윁남 공산당은 낡은 리념과 무기를 버리고 개혁과 개방을 택했다. 호지명 주석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실용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윁남의 실용정신은 전쟁을 치렀던 미국과 남조선, 중국과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경제발전과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중심국가가 되었다. 특권을 반대하고 나라와 인민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윁남 공산당이 있는 한 윁남의 미래도 밝다.

지금까지 제15부 변화하는 윁남 공산당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러시아와 동유럽의 개혁개방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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