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기적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제22부 동유럽 나라들의 민주화혁명

개혁개방의 기적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7-28 15:20




1989년, 동서 랭전의 한 축이였던 동유럽 사회주의가 일시에 몰락했다.



첫 시작은 뽈스까였다. 1989년 6월,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바웬사가 이끄는 민주세력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에 따라 뽈스까의 사회주의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뽈스까의 민주화는 10년 전부터 시작되였다. 1980년 5월과 8월, 뽈스까 전역에서 공산당에 반대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로동자들의 파업이 진행됐다. 9월에는 그단스끄 조선소 로동자의 대규모 파업을 계기로 레흐 바웬사가 주도하는 로동조합련대가 발족돼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구심이 된다.



뽈스까 공산당은 로동조합련대를 불법화하고 6700명에 이르는 지도자들을 체포했지만 바웬사를 중심으로 한 민주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젊은 지도자들의 뛰어난 전술과 전략 그리고 투지는 뽈스까 인민들을 침묵과 랭소주의에서 벗어나게 했다. 수십만 명의 젊은 로동자들이 공산당을 탈당했고, 전 국민의 3분의 1이 로동조합련대에 가입했다. 인민의 대다수가 독재와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원한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쏘련에서 시작된 개혁과 개방은 뽈스까 민주화의 기폭제가 됐다. 꼬르바쵸브는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에 대한 내정 개입 중단을 선언했다.



로동조합련대를 중심으로 한 인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갈수록 거세졌다.



(효과음 삽입 - 군중소리)

(레흐 바웬사의 말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민이 단결한다면 우리는 강합니다. 로동조합련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요구할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판단한 뽈스까 공산당은 결국 민주세력이 요구한 자유선거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은 공산당 독재를 포기한 것이다. 45년간의 공산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실현됐었다.



(장면 전환)



뽈스까의 뒤를 이은 것은 이전 사회주의 시절 웽그리야로 불리던 마쟈르였다.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 중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마쟈르였지만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인민들의 요구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9년 1월,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 개혁파는 ‘결사법’을 통과시켜 복수정당제와 단체 조직의 자유를 보장하는 개혁조치를 발표한다. 5월에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고 6월에는 야당, 시민단체, 로동조합 등과 정치개혁방안을 합의하기에 이른다.



10월에는 마쟈르 공산당이 전당대회를 개최해 공산주의 리념과 쓰딸린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주의 정당으로 탈바꿈한다. 며칠 뒤 마쟈르 의회는 찬성 333표, 반대 5표라는 압도적인 다수로 로동자계급의 독재와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삭제하고 나라이름도 마쟈르 공화국으로 바꾸는 헌법 개정을 단행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민주화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마쟈르의 개혁과 폭력 없는 혁명은 다른 사회주의 나라에 확산되여 동구의 변화를 주도하였다.



(장면 전환)



마쟈르의 민주화혁명은 체스꼬슬로벤스꼬로 이어졌다.



체스꼬슬로벤스꼬는 일찌감치 쏘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 국가를 향한 투쟁을 진행했다. 투쟁의 불길이 가장 높이 타오른 것은 1968년이었다. 당시 세계인들은 체소꼬슬로벤스꼬를 뒤덮은 독립의 물결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은 쏘련의 군사 개입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이후 구스따브 후싸크가 이끄는 체스꼬슬로벤스꼬 공산당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쏘련에 추종하는 정책을 펼쳤다.



20년에 걸친 인민들의 침묵은 개혁개방과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깨지기 시작했다. 1989년 8월, 20년 전 쏘련 군대의 프라하 침공에 항의하는 투쟁이 시작됐고, 투쟁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11월에 들어서며 프라하를 중심으로 한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련일 계속 되고 민주화운동단체인 ‘시민포럼’이 조직되였다.



23일에는 21년 전 쏘련군대에 의해 쫓겨난 두브체크가 시위에 참석해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며 쓰딸린 로선의 공산당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다음날 35만의 인민이 참석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체스꼬슬로벤스꼬 공산당 총비서를 비롯한 주요 간부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민주화를 우한 인민들의 투쟁은 계속됐다. 결국 11월 29일,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과 일당독재 포기, 맑스-레닌주의 삭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이 받아들여진다. 12월에는 ‘시민포럼’의 지도자인 하벨이 대통령으로, 두브체크가 련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된다.



20년간 늦춰졌던 체스꼬슬로벤스꼬의 해방이자 프라하의 봄이 완성된 것이다.



(장면 전환)



벌가리아에서도 공산당 주도의 개혁이 11월부터 시작됐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인민들의 민주화 시위는 거세지 않았지만, 벌가리아 공산당은 민주화의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고 스스로 개혁에 나섰다. 35년간 친쏘정책을 펼친 또도르 쥡꼬브 벌가리아 공산당 총비서가 물러났다. 새로운 총비서가 된 므라데노브는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헌법에서 삭제하고 언론자유와 정치범 석방 등 8개항의 민주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벌가리아 공산당은 민주화 로선을 앞장서서 채택했다.



(장면 전환)



동구 사회주의 나라 대부분이 평화롭게 민주화혁명을 달성한 것과는 달리 로므니아의 챠우쉐스꾸는 변화의 물결을 끝까지 거부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1965년 권력을 장악한 니꼴라에 챠우쉐스꾸는 독재를 강화하고 국가를 개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김일성을 신통히도 본뜬 개인우상화를 실시했고 보위부와 비밀보안부에 의존한 공포통치를 자행했다. 나라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모든 정보를 차단해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독재가 심했다.



1989년 11월, 민주화의 거대한 물결이 동구 사회주의 나라를 휩쓸고 있는데도 챠우쉐스꾸는 다른 나라들의 개혁을 비판하고 변화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오랜 독재정치에 지친 인민들은 목숨을 내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12월 16일과 17일, 티미쇼아라시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한 보안원의 무력대응으로 학살사건이 빚어졌다. 이 사건은 잠자고 있던 로므니아 인민들의 분노를 불러와 전국적인 항의시위를 불러왔다. 부꾸레씨띠에서 10만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12월 21일, 인민들의 힘에 놀란 챠우쉐스꾸는 부랴부랴 타협책을 내놓는다.



“나는 오늘 로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중앙위원회의 중요한 결정을 발표하겠습니다. 1월 1일부터 최저임금을 년 2000에서 2200레이까지 인상하겠습니다.”



하지만 챠우쉐스꾸 독재 타도를 향한 인민들의 저항은 더 거세져 갔다. 또 시위 진압을 명령 받은 군대는 오히려 인민들의 편에 서 챠우쉐스꾸 호위부대와 교전을 벌렸다. 인민들과 군대가 공산당 본부와 국영방송국을 점령하자 챠우쉐스꾸 부부는 직승기를 타고 도망쳐야 했다. 시골로 도망쳤단 군대에 의해 체포된 챠우쉐스꾸 부부는 25일, 군사재판을 받고 곧바로 체포된다.



권력을 장악한 구국전선평의회는 공산당 일당독재 폐지, 자유선거 실시, 인권 존중, 해외려행 자유화 등 10개항의 개혁조치를 발표해 민주화를 실현한다.



(장면 전환)



동구 나라들의 민주화 혁명의 가장 중요한 력사적 조건은 사회주의의 실패였다. 2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나라 인민들을 지배했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은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실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동수 사회주의의 몰락과 민주화 혁명은 그 어떤 위대한 사상도 인민의 이익과 력사발전의 요구에 맞지 않는다면 거대한 인민의 힘으로 반드시 몰락하고 만다는 것은 보여준 력사적 교훈이었다..



지금까지 개혁개방의 기적 제22부 ‘동유럽 나라들의 민주화혁명’ 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23부 ‘동유럽 나라들의 개혁개방 그 이후’ 편을 보내드립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