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기적

  • 방송정보 | 종영방송
  • 출연진행:

공식 SNS

제18부 로씨야의 경제 부흥

개혁개방의 기적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7-28 15:20




# 1



쏘련 공산당의 몰락과 꼬르바쵸브의 실각. 그것은 본격적인 변화의 시작이었다.



1991년 6월, 12일, 57%의 득표로 로씨야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옐찐은, 그 해 8월에 보수파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쿠테타를 저지했다. 같은해 12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지도자와 만나 쏘베트 련방의 해체와 독립국가련합 결성을 선언했다.



로씨야공화국을 포함한 15개 쏘베트공화국들은 '사회주의' 혹은 '쏘베트'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시도했다.





면적 1천7백만km2, 동쪽으로는 태평양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이어진 세계 최대의 령토를 가진 거대한 국가 로씨야. 그러나 이 거대한 나라도 급격한 개혁으로 인한 혼란을 막지 못했다.



개혁의 방향과 속도를 놓고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다. 쿠테타 세력은 진압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대의원들은 공산주의 보수파들이었다. 이들은 옐찐의 개혁을 사사건건 반대하고 나섰다. 로씨야 최고회의 의장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파와 '시민련맹'을 중심으로 부통령이 주도하는 중도파가 옐찐의 개혁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옐찐은 개혁에 대한 신임을 묻는 전체인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에서 승리한 옐찐은 1993년 9월 개혁에 반대하는 최고회의를 해산하고 10월에는 국회의사당에서 무력저항을 하는 보수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련이어 12월의 선거에서 1978년에 제정된 옛 쏘베트 련방 헌법을 폐지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한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 2



정치적 반대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한 옐찐. 그러나 그것만으로 개혁개방이 성공할 수는 없었다. 인민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발전시켜야 했다. 당시 로씨야는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새로운 시장경제 체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경제적 혼란이 극심했다. 공산주의 보수파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로씨야의 영웅 옐찐도 이와 같은 혼란을 수습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로씨야의 경제침체는 갈수록 심화되어, 1990년 이후에는 미누스 성장을 기록했다.



로씨야 경제전문가(여자) : "1992년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200배나 뛰어 올랐습니다. 인민들은 극심한 불안에 휩싸였죠."



1995년부터 1997년 전반까지 경제상황이 다소 호전되기도 했으나, 1997년의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로씨야 경제는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로씨야 경제전문가(여자) : "로씨야는 과거 쏘련 시절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어요. 아시아의 금융위기로 돈을 받지 못한 나라들이 많이 생기자, 과거 쏘련에 돈을 빌려줬던 나라들도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나라들은 로씨야 정부에 돈을 갚으라고 한꺼번에 요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로씨야는 그 많은 빚을 한꺼번에 갚을 돈이 없었습니다."



1998년 결국 로씨야 정부는 돈을 갚을 수 없다며 파산 선언을 했고, 로씨야 경제는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1998년 경제 성장률은 미누스 5.3%를 기록했다. 치안, 민생문제, 부정부패까지 겹쳐 로씨야 정세는 총체적인 어려움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옐찐은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더구나 옐찐은 건강까지 나빠졌다. 1999년 12월 31일 옐찐은 결국 경제적 혼란의 와중에 당시 총리를 밭고 있던 울라지미르 뿌찐에게 정치적 지도권을 물려주었다.



# 3



음악2) 변화와 도약을 표현하는 음악

2000년 3월 대통령에 당선된 뿌찐은 '로씨야 재건'을 웨치며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펼쳤다. 정치적 안정의 바탕을 마련한 뿌찐은 자신을 경제대통령이라고 자처하며 경제성장에 의욕을 보였고, 경제발전에 국가의 력량을 집중했다. 때마침 국제정세도 뿌찐과 로씨야를 돕고 있었다. 국제원자재가격이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막대한 원유와 천연가스를 보유한 로씨야의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로씨야 경제관료(남자) : "1998년 미누스 5.3%였던 경제성장률이 1년 후인 1999년, 플러스 6.3%로 급격히 높아졌어요. 2000년에는 10%나 성장했죠. 그 이후로도 몇년 동안 로씨야는 년 평균 6% 이상의 고속성장을 이어갔습니다."



실업률도 1999년 12.6%에서 2006년에는 7%로 약 50%가 감소했다. 외환보유액도 크게 늘었다. 외화가 없어 빚을 갚지 못하겠다고 한지 7년만인 2005년 2257억 딸라의 외화를 보유해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2001년 32억 딸라에 불과하던 것에 비해 무려 70배나 늘었다.



2004년 겨울. 로씨야 심장부라고 불리는 붉은광장.

아직 이른 시간인 오전 10시부터 붉은광장 앞 백화점과 대형물품상점에는 인민들로 붐빈다. 광장 맞은편 백화점에서 겨울철 솜옷을 팔고 있는 알렉세이의 얼굴에 미소가 비친다.

음악2) 페이드 아웃



(시민1)"류례없이 따뜻한 겨울을 맞아 겨울옷이 적게 팔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올 겨울에는 겨울옷을 사는 사람이 크게 늘었습니다."



오후에 찾은 광장 앞 지하상점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빈다. 물건을 구경하는 한 젊은이의 표정이 들떠있다.



(시민2)"예전에 비해 소득이 많이 늘었어요. 그 때문에 전보다 더 자주 이상점에 찾아옵니다. 전 보다 더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어 좋아요."



# 4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달성한 뿌찐은 2004년 5월. 제4대 대통령에 또 다시 선거되었다. 대통령에 다시 오른 뿌찐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로씨야를 국제적인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 뿌찐이 계획한 개혁의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정부기관을 통합했으며, 국영기업을 민간인에게 넘겼다.



경제관료(남자) : "가스 산업의 경우, 가스 관은 국가가 관리하고 생산과 판매는 민간기업소가 담당하게 했습니다. 국가가 모두 맡아서 하는 것보다 일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철도업무를 총괄하던 철도부는 규제 부문만 맡고 상업 기능은 민간 기업소가 맡게 하는 정책도 추진했습니다."



뿌찐은 부패를 척결하고, 관료들이 당의 간섭을 받지 않게 하는 전문관료제를 강화했으며, 대형 기업소 지배인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는 등 기존 개혁정책을 더욱 가속화하기도 했다.



꾸준한 개혁과 개방으로 로씨야의 수출은 늘었고, 경제성장률도 높아졌다. 그 결과 시장경제체제도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로씨야 인민들은 10년 가까운 혼란의 시기를 지혜롭게 극복했다. 이제 자유롭게 일하고 자신이 일한 만큼 돈을 벌기 시작했으며, 그 돈으로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마음껏 살 수 있게 되었다. 사회주의 실패를 깨끗이 인정하고, 력사의 우여곡절을 이겨낸 로씨야. 21세기 새로운 경제강국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개혁개방의 기적 제18부 ‘로씨야의 경제부흥’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19부 개혁개방 이후 로씨야 인민의 생활변화 편을 보내드립니다.
전체 0

국민통일방송 후원하기

U-friends (Unification-Friends) 가 되어 주세요.

정기후원
일시후원
페이팔후원

후원계좌 : 국민은행 762301-04-185408 예금주 (사)통일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