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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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부 미국과의 관계개선

개혁개방의 기적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7-28 15:20




2007년 6월 18일 미국 뉴욕. 응웬 밍 찌엣 윁남 주석이 6일 간의 미국 방문을 위해 도착했다. 미국과의 전쟁 후 처음으로 윁남의 최고지도자가 미국 땅을 밟은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국 방문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찌엣 주석의 답변이었다.



(응웬 밍 찌엣 윁남 주석입니다.)



“윁남에게 미국은 항상 주요한 동반자가 될 것이며 미국과의 협력에 대한 우리의 약속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두 나라간 우정과 협력이 영원히 성장해가길 바랍니다.”



불과 30여 년 전, 미국과의 전쟁에서 수백만의 인민이 죽거나 다치는 큰 희생을 당한 윁남의 최고지도자가 철천지 원쑤라 할 수 있는 미국을 찾아가 동반자라고 선언한 것이다. 왜? 무엇 때문일까? 그의 미국 방문 일정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을 방문한 찌엣 주석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세계 경제의 중심인 뉴욕 증권거래소. 찌엣 주석은 100여 명의 윁남 기업가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윁남에 대한 투자를 호소했다.



(이어지는 찌엣 주석의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투자자를 환영합니다. 무엇보다 첨단 기술 분야의 투자를 원합니다.”



다음날 회견에서도 찌엣 주석은 윁남 경제를 계속 개방해 세계 경제에 통합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윁남에 대한 투자를 요청했다. 부쉬 미 대통령과의 회담에선 무역과 투자에 대한 기본협정에 서명했다. 찌엣 주석의 방문이 미국과의 경제협력과 투자를 요청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75년 윁남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물리치고 통일을 달성했다.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미국에 맞서 승리한 유일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통일을 달성했지만 무리한 사회주의 경제정 책을 밀어붙이며 경제가 악화됐고, 삼모작까지 가능한 윁남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150만에 이르는 인민이 해외로 탈출했고 나라는 점점 더 가난해졌다.



(윁남 아시아태평양 경제센터의 버 다이르억 소장의 설명입니다.)



“윁남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심각한 경제공황을 겪었습니다. 물가상승률이 높은 것이 윁남의 경제공황을 대변했습니다. 1년간 물가상승률이 700%에 이른 적도 있습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쏘련의 지원 중단은 윁남 경제를 최악으로 몰아넣었다. 이전까지 쏘련은 윁남의 최대 지원국이었다. 하지만 개혁과 개방을 선언한 고르바쵸브는 윁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무역 거래에서 딸라 결제를 요구했다. 쏘련의 지원이 끊기자 윁남은 최악의 위기를 맡게 된다.



결국 1986년 윁남 공산당은 력사적인 개혁개방 로선을 선언했다. 개인농과 장사를 허용하고 경제를 개방했다. 이것이 바로 도미모이정책이었다. 그 결과 식량생산이 두세배로 늘었고, 굶주림은 해결되였다.



(윁남 농민 하반비의 설명입니다.)



“개혁정책이 실시되고 농민에게 경작권이 준 이후 로동력이 향상되어서 생산량이 2, 3배로 늘어났습니다. 약 330평방미터인 북쪽 논에서 전에는 60kg의 쌀을 생산할 수 있었는데 도이모이 이후에는 150에서 180kg까지 생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어떤 논에서는 220kg까지도 생산했습니다.”



윁남은 지금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이 됐다. 개혁정책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였다. 그러나 농업분야의 성장이 다른 공업분야로 이어지지 못했다. 국가의 재정이 없다보니 산업기반시설 건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회주의 윁남에 대한 외국 기업들의 투자도 신통치 않았다. 개혁개방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실수도 많았다.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전환을 꿈꾸던 윁남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그것이다. 초대 미국주재 윁남대사였던 레밤방 현 외교부 차관의 증언을 들어보자.



“개혁정책이 진행 중이던 1986년부터 윁남에는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윁남은 시장개방과 더불어 국제사회로의 진출, 여러 선진국들과의 협력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윁남 공산당은 불과 20년 전까지 치렬하게 전쟁을 치렀던 미국과 관계개선에 나섰다. 윁남 인민들에게 미국과의 화해는 쉽지 않았다. 11년에 걸친 전쟁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군인과 민간인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전 국토는 폐허가 됐고 후유증은 심각했다. 윁남 인민들에게 미국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 내에서도 윁남과의 관계개선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윁남은 경제발전을 위해, 미국은 과거 전쟁의 상처를 씻고 동남아시아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 결국 두 나라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용서하는 길을 택했다.



두 나라는 먼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줄이기 위해 신뢰를 쌓는 일부터 시작한다. 1991년 미국은 윁남에 대한 려행금지를 해제했고, 다음해에는 미국 기업들의 윁남 진출을 허용한다. 이에 윁남은 전쟁 당시 실종된 미군에 대한 조사를 허가하는 조치로 응답했고 다시 미국은 윁남에 대한 경제제재를 전면 해제한다.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던 두 나라는 1995년, 외교관계를 정상화한다.



(이어지는 레밤방 윁남 외교부 차관의 발언입니다.)



“윁남과 미국의 전쟁은 윁남에게는 가장 격렬한 전쟁이었고 미국에게도 쉽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윁남 력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미국과 관계 개선이 이뤄짐으로써 윁남의 개방정책이 세계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국제적인 우호관계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2000년 11월, 클린톤 미국 대통령이 윁남을 찾았다. 국회의원과 참전장병, 기업인들과 함께였다. 클린톤 대통령의 윁남 방문, 그것은 두 나라의 화해를 상징하는 극적인 사건이였다. 그리고 2006년 부쉬 대통령의 윁남 방문과 2007년 응웬 밍 찌엣 윁남 주석의 미국 방문으로 량국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됐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윁남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2000년 이후 해마다 7% 이상의 높은 성장을 기록했다. 외국 기업들의 투자도 이어져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앞다퉈 윁남에 공장을 지었다. 실업률은 떨어졌고 윁남 인민들의 삶은 크게 개선됐다. 2007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해 국제경제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인정받았다. 개발도상국가를 대표해 유엔 안전보장리사회 비상임리사국이 됐다. 동남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선 것이다.



(레밤방 윁남 외교부 차관입니다.)



“2007년 윁남의 외교적인 성과를 보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호지명 주석께서는 윁남이 세계의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윁남은 부강한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미국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지금 윁남의 지도자들은 미국과 손을 잡고 그 꿈을 실현하고 있다.



‘개혁개방의 기적’, 제13부 ‘미국과의 관계개선’ 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14부 ‘청년 윁남’ 편이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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