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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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부 도이췰란드 통일 그 이후

개혁개방의 기적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7-28 15:20




2009년 11월 9일, 도이췰란드 분단의 상징, 브란덴부르그 문 앞에 2.3m 높이의 모형벽 1천개가 차례로 쓰러진다.



곳곳에서 박수와 환호가 쏟아지고, 각양각색의 조명이 눈부시다. 20년 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기념하기 위해 모형벽 천개를 쓰러뜨린 것이다.



이날 행사를 위해 전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메드베제브 로씨야 총리,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클린톤 미 국무장관, 도이췰란드 통일에 큰 역할을 했던 꼬르바쵸브 전 쏘련 대통령도 모습을 보였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모두의 표정이 밝다.



메르켈 도이췰란드 총리는 연방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고, 평소 잘 웃지 않던 메드베제브 로씨야 대통령마저 환한 웃음을 보인다.



자리를 함께 한 수만 명의 시민들도 장벽 붕괴로 인한 통일을 환영했다.



“통일 과정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90% 정도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이 된지 20년이 지난 지금, 과연 통일은 도이췰란드 인민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도이췰란드 통일은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인한 동부 독일 인민들의 서부 독일로의 이주는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해 있던 동부 독일의 경제를 큰 곤경에 빠뜨렸다.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동부 독일과 서부 독일은 점진적인 통일을 포기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년 뒤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갑작스런 통일을 하게 된다.



통일은 쉽지 않았다. 경제력 격차가 우선 큰 문제였다. 통일 직전 서부 독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9300딸라, 동부 독일은 5800딸라에 불과했다. 락후한 동부 독일의 경제를 되살리는 데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이췰란드 내무부 동부지역 담당관 슈테판의 말입니다.)



(삽입 - 슈테판)

“통일 당시 동부 독일이 세계 10위정도 경제력이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터무니없는 결과가 드러났습니다. 동부 독일의 경제력은 동구권 내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였습니다.”



통일 정부는 동부지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1990년 이후 동부지역에 지원한 돈만 1조9000억 딸라에 달한다. 국내총생산의 4~5%를 투자해 도로와 산업기반시설 건설 등 동부지역의 경제 재건에 나섰지만 효과는 더뎠다. 화폐 통합 과정에서 1대1로 화폐교환을 단행한 것은 동부 지역의 물가상승과 함께 두고두고 도이췰란드 경제에 부담이 됐다. 동부지역의 낮은 생산성은 기업들의 투자를 꺼리게 만들었고, 이는 실업률의 증가로 이어졌다. 겉으로 동부와 서부의 로임 차이는 사라졌지만 실질적으론 동부 지역의 로임은 서부 지역의 8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주민들 간의 이질감도 큰 문제였다. 서부 독일 출신들은 동부 독일 출신들을 게으르고 돈만 축낸다고 오씨라 불렀고, 반대로 동부 독일 출신들은 서부 독일 출신을 돈은 있지만 거만하다고 해서 베씨라 불렀다. 급작스런 흡수통일은 동부지역 출신에게 락오된 희망을 안겨주었고 서부지역 출신에겐 부담스러운 만족을 안겨준 것이다.



2010년 통일 20돐 기념행사 연설에서 크리스티안 볼프 대통령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삽입 - 크리스티안 볼프)

“통일이후 성과가 많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회적 통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도이췰란드 통일이 성공적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무력 충돌이 아닌 평화적 통일을 달성했고, 국제사회에서 도이췰란드의 위상도 그만큼 올라갔기 때문이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던 군사비를 줄일 수 있게 됐다. 통일 이전 서부독일은 49만의 군인이, 동부 독일은 17만의 군인이 있었지만 통일 이후 2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줄어든 군대의 수만큼 젊은 인재들이 다른 분야에서 활동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제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 도이췰란드는 지난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 제1의 수출대국 지위를 지켜왔으며, 현재는 중국에 이어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총생산은 미국, 중국, 일본, 인디아에 이어 세계 5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없이 퍼붓기만 할 것 같았던 동부지역 재건사업도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체스꼬와 린접한 도이췰란드의 국경 도시 드레즈덴, 도시의 상징 프라우엔 교회는 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뼈대만 남은 채 오래 동안 방치돼오다 통일 직후 복구공사에 들어갔다. 2006년 다시 일반인에게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복구비용만 1억7천7백만 딸라가 들어간 대규모 공사였다. 통일 정부는 드레즈덴과 체스꼬의 유명 관광지 프라하를 잇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적극적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드레즈덴 주민 이본의 말입니다.)

“관광객 수가 크게 늘었어요. 만약 통일이 없었으면 재건도 없었을 것이고 재건이 없었으면 이런 아름다운 관경을 보러 오는 관광객도 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부지역의 다른 상업도시 라이프치히.



이곳 역시 2차 대전 당시 폐허가 됐다가 구 동독시절에는 공해도시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 라이프치히의 공기는 맑아졌고 도시는 깨끗해졌다.



기업들도 몰려와 세계적 물류기업인 DHL의 자회사가 최근 본사를 이곳으로 옮겼고, 지난 2001년에는 자동차기업 BMW가 이곳에 공장을 차렸다.



통일 직후 20%가 넘던 동부지역의 실업률은 절반수준까지 내려왔다. 막대한 투자가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르트무트 코쉭 재무차관은 통일로 얻게 된 평화와 자유, 국가경쟁력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리득이라고 강조했다.



“2008년과 2009년 세계적 경제위기가 있었을 때 도이췰란드가 문제없이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통일과정에서 이루어진 미래를 위한 투자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통일은 한때 도이췰란드 인민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도이췰란드 정부와 인민들은 인내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통합을 이뤄갔다. 그 결과 한때 유럽에서 마지막 랭전세력의 대결장소와 분단의 상징이였던 베를린은 이제 통일의 수도로 유럽련합의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도이췰란드는 유럽련합과 국제사회를 이끄는 핵심 국가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돈으로 따지기 힘들 정도의 정치적, 국민적 발전을 통일을 통해 얻은 것이다.



지금까지 개혁개방의 기적 제21부 ‘도이췰란드 통일 그 이후’ 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22부 ‘동유럽 나라들의 개혁개방’ 편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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