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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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부 쏘련의 개혁개방과 꼬르바쵸브

개혁개방의 기적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1-07-28 15:20




미하일 꼬르바쵸브.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쏘련공산당 총비서. 로씨야에서는 아직 론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는 쏘련 공산당의 붕괴와 쏘베트 사회주의 체제의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지도자였다.



로씨야 시민(녀)의 인터뷰 : “불행하게도 그의 실수 때문에 개혁을 너무 천천히 진행시켰습니다.



로씨야 시민(남)의 인터뷰 :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여 세계사에 위대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고령의 브레쥬네브가 통치하고 있었다. 쏘련에서는 경기침체와 정치적인 압제가 계속됐다. 당시 공산당 하급 간부였던 꼬르바쵸브의 좌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꼬르바쵸브 : “언젠가 로씨야에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 쏘련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체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 그들은 아무 일도 못했습니다. 간부들도 무기력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 때문에 모두 어쩔 수 없었습니다.”



1980년 꼬르바쵸브는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권력의 핵심권으로 들어감으로써 권력의 정상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1980년 브레쥬네브가 세상을 떠났다. 국가안전위원회, KGB의 의장이었던 안드로뽀브가 다음 기 쏘련공산당 총비서로 선출됐다. 1983년 6월 16일 쏘련최고쏘베트회의 의장(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강화하던 안드로뽀브는 1983년 8월에 갑자기 중병에 걸렸고, 그 후 다시는 공개 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가 쏘련의 지도자로서 이룩한 업적은 거의 없었고, 그의 경쟁자였던 체르넨꼬가 뒤를 이어 쏘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안드로뽀브가 경제를 개혁하고 관료적 비효률성과 부패를 뿌리 뽑으려고 애쓴 반면, 체르넨꼬는 브레쥬네브 체제하에서 일해 온 관료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반대로 외교문제에 있어서는 강경로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미국과 쏘련의 랭랭한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러나 체르넨꼬도 권좌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건강이 나빠졌다. 드디어 꼬르바쵸브에게 기회가 왔다.



1985년 체르넨꼬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밤 꼬르바쵸브는 부인 라이싸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KGB의 도청을 피해서 그는 라이싸에 게 말했다. ‘변화를 바란다면 내가 지도자가 돼야 한다. 이런 식으론 더 이상 살 수 없다.’



며칠 후, 쏘련 공산당 정치국은 만장일치로 꼬르바쵸브를 쏘련 공산당 총비서로 선출했다.



꼬르바쵸브는 체제를 개혁하고 글라스노스트와 뻬레스뜨로이까, 즉 개혁개방 정책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거의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당시 한 간부의 인터뷰(남) : ‘회의에서 여러 번 그를 만났습니다. 꼬르바쵸브는 굉장히 신중한 모습이었는데, 그래서 더 그를 신뢰하게 되었죠?’



서방세계는 곧 변화의 조짐을 느꼈습니다. 1985년 제노바에서 처음으로 꼬르바쵸브는 레간 미국 대통령과 력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당시는 랭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러나 꼬르바쵸브는 그런 분위기에 얽매이지 않았다.



꼬르바쵸브 인터뷰 : “제노바에서 서방측 인사를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 매우 만족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방사회도 좋은 점들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죠. 우린 그저 다른 나라 다른 체제에 살고 있을 뿐 여전히 똑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두 지도자는 력사적인 성명서에 서명했다. 핵전쟁에서 승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핵전쟁은 일어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레간 대통령 : ‘앞으로 남은 일이 많지만 우린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꼬르바쵸브, 당신에게 우리와 함께 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며, 허락할 줄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실제 목소리 26:23부터)



1986년 4월 새벽. 쏘련 체르노빌에서 핵시설이 파괴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사고 이후 쏘련 공산당은 참사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소식은 곧 서방세계에 퍼졌다. 서방세계는 여전히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는 쏘련을 보며, 꼬르바쵸브의 개혁개방을 비웃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난 꼬르바쵸브는 간부 회의에서 즉시 서방세계에 진실을 밝히고 필요한 모든 조치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꼬르바쵸브는 개혁개방에 대한 압력을 시작했다.



꼬르바쵸브는 스딸린의 잔인한 탄압과 군비확장 경쟁의 문제점을 다룬 영화를 상영했다. 200만 명의 쏘련 인민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동안 금지되었던 문학작품과 력사책, 그리고 정치적 사건 자료들이 공개됐다.



피해자 인터뷰 (할머니) : ‘꼬르바쵸브가 권력을 잡고 나서 아버지가 왜 잡혀갔는지, 내가 왜 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쫓겨났는지 알게 됐습니다.



꼬르바쵸브는 한편으로는 과거 체제의 문제점을 공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정치개혁에 착수했다.



꼬르바쵸브 : ‘처음에는 체제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보수 세력이 반발했습니다. 1988년 공산당 대회에서 체제를 개혁하는 대신 체제를 일부 변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선거제도를 도입한 리유는 과거 세력이 언젠가 권력을 빼앗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죠. 선거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인민으로부터 선거된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꼬르바쵸브는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다. 최고쏘베트인민회의에서 꼬르바쵸브가 최초의 쏘련대통령으로 선거되었다. 공산당 일당 독재는 드디어 폐지되었다.



1987년 워싱톤에서는 군축회담이 열렸다.



레간 : ‘오늘, 미국 대통령인 본인과 쏘련 공산당 총비서 꼬르바쵸브는 미국과 쏘련에서 핵무기를 제거하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력사적인 순간입니다.’



랭전은 끝났다. 개혁개방을 과감하게 실행한 꼬르바쵸브의 노력으로 쏘련은 그렇게 해체되고 있었다.



‘개혁개방의 기적’, 제16부 쏘련의 개혁개방과 꼬르바쵸브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17부 개혁과 반개혁 편이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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