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고뿌

남조선 생활기
작성자
국민통일방송
작성날짜
2013-12-23 18:04

 

몇 달 전 어느 행사에 가서 받은 선물이 책상 한 구석에 그냥 처박혀 있다. 고뿌(컵)라고 하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펼쳐봤다. 분홍판에 알록달록 하얀 꽃 무늬가 그려진 포장지를 열어보니 예쁘고 아담지게 생긴 고뿌가 들어있다.

이런 고뿌도 북한 땅에서라면 정말 귀한 물건이다. 지금은 돈이 있으면 뭐든지 다 살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돈 없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그림의 떡일 것이다. 참, 고뿌를 보니 이거 하나 없어서 얼굴 붉히며 선생님의 욕을 얻어먹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한창 학교 다니 던 80년대엔 학교에서 뭐 내라는 게 그리도 많던지, 널빤지, 각자, 세멘트, 비닐방막, 못,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가 건설장도 아니고, 뭐든지 닥치는대로 내라고 하니 어떤 애들은 만화에 나오는 요술지팡이가 있었음 얼마나 좋겠냐며 소원하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 모시기 사업이라며 조별 과제가 떨어졌다. 1조는 차판, 2조는 깨끗한 걸레, 3조는 고뿌, 이런 식으로 할당량이 주어졌다. 3조에 속해있던 나에겐 고뿌가 차례졌다.

그 당시 어머닌 외가에 가셔서 집에 안계셨다. 혼자 식장을 열고 이리저리 찾아보았으나 고뿌라고 생긴건 단 3개 밖에 없었다. 그 것 마저 하나는 손잡이가 떨어져 있었다. 성한 걸 가져가면 어머니한테 야단 맞을 것 같아 일단 쪽지 떨어진 고뿌를 꺼내 들었다.

근데 고민이 많았다. 손잡이 떨어진걸 가져가면 분명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생활총화 때 동네 북이 될 건 뻔했다. 어떻게 모면할 수 있을지 한참을 생각하다 무릎을 탁 쳤다. 한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얼른 고뿌를 가지고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서니 마침 선생님이 계셨다. 난 주저없이 가방에서 고뿌를 꺼내어 선생에게 들이밀었다.

“선생님, 어쩜 좋습니까, 이거 고뿌를 가져 오다가 가방을 떨어뜨리는 통에 손잡이가 부러져 나갔습니다.~” 그러자 선생이 찬찬히 고뿌를 이리 저리 흩어보더니, 너 왜 거짓말 하냐고 대번에 따지고 드는 것이었다.

속으론, “귀신이냐? 어떻게 알았지?” 하면서도 겉으론 “아닙니다. 진짭니다. 거짓말 안했습니다.”하며 딱 뻐겼다. 그러자 선생은 “야, 이게 오늘 깨진게야? 니 눈이 있으면 봐라, 싹 닳아 반질반질해졌는데, 이래두 계속 우길거야?”하며 점점 독을 썼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금방 떨어진 유리는 날카롭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던 것이었다.

그날 난 한 시간동안이나 욕을 얻어먹었고, 생활총화 땐 비판무대에 까지 나가 혼쭐이 났었다. 어떤 앤 날 반동이라고까지 몰아세웠다. 초상화 모시기 사업에 그런 고뿌를 가져온 자체가 반동행위라는 것이었다.

여기선 흔해 빠져 구석에 방치돼 있는 고뿌 하나가 없어 닭 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곤욕을 치르던 생각을 하면 그저 맥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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