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부 새로운 출발

등록일 2011.08.07


샘, 어제 박선생이 와서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네. 지난 번 잭과의 일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불리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추방까지 당하게 될지는 예상을 못했네. 아직까지 실감이 나질 않는구만.

박선생 : 한스 선생! 내일 당장 떠나셔야겠습니다. 지난번에 신청한 립국사증 기간 련장은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한 스 : 아니, 박선생! 갑자기 떠나라니요,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박선생 : 당장 우리 공화국에서 나가란 말입니다. 당신 같은 불순분자가 우리 조선을 더럽히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스 :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안되겠습니다. 아무래도 내일 평양 사무실에 가서 직접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박선생: 아무리 그래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한 짓이 있는데 왜 이리 뻔뻔합니까. 병원 일을 핑계로 우리 북조선을 더 이상 팔아먹지 마십시오!

한 스 : 지난 번 평양에서 잭과 있었던 일을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북조선을 팔아먹다니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새로 신청한 의약품도 도착할 텐데, 이러지 마십시오.

박선생 :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한 스 : 박선생, 그럼 지금 있는 립국사증이 만료 될 때까지만 남게 해 주십시오. 아직 열흘 정도 남았지 않습니까. 이 기간 동안만이라도 병원 일을 정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박선생: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선생은 추방당하는 겁니다. 비행기는 내일 평양에서 아침 10시에 떠납니다. 오늘 밤에 무조건 짐을 싸십시오.

한 스 : 정 그렇다면 좋습니다. 저도 립국사증 기간이 끝날 때까지 나가지 않겠습니다.

박선생 : 제 발로 가고 싶습니까? 들것에 실려 나가고 싶습니까? 우리 좋은 얼굴로 헤어집시다.

한 스 : 그래, 하나만 물어봅시다. 진짜 제가 추방당하는 리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리유라도 알아야되지 않겠습니까.

박선생 : 그동안 공화국 친선 메달을 리용해서 정탐활동을 했고, 그리고 지난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내가 말 안 해도 알거요. 우리나라를 미국 놈한테 팔아먹은 게 걸렸으니, 더 할 말 없겠지? 당신 같이,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에 칼을 품고 있는 음흉한 사람은 더 이상 우리 공화국에 있을 필요가 없소.

난 내 힘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직감했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보니 막막하더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네. 짐이 별로 많지 않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네.

가방을 한쪽에 쌓아 두고 나니 만감이 교차하더군.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후임자를 위해서 서류정리에 들어갔네. 의약품 상황을 기록하고, 환자의 진료깔따를 정리했는데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다네.

잠을 자지 못했는데 머리속은 점점 맑아지더군. 난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채 잠시 눈을 감았네.

한스 : 1년 반 전, 나도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당신처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북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나의 손길이 고통받고 있는 조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고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압제와 폭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조선 사람들에게 나의 의료활동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편지가 당신이 북조선을 리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북조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빨리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이제 곧 나를 데리러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 같네. 창밖은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았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구만. 약이 없어 치료도 못받고 힘없이 돌아서던 사람들,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고통을 참아내던 진경이의 얼굴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네. 길 가에 죽어 있던 꽃제비 소년의 새카만 발을 묻고 돌아오던 날,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도 기억났다네. 김복식의 호탕한 웃음과 쓸쓸한 눈매가 떠올랐을 땐 눈물이 핑 돌더군.

샘, 이렇게 내 북조선 생활은 ‘추방’이라는 결말로 끝이 나는군. 누가 이런 결말을 상상이나 했겠나. 하지만 성실히 진료활동을 했고 양심의 울림에 따라 행동했으니 후회는 없다네.
이것으로써 북조선을 위한 활동이 끝났다고도 생각하지 않네. 이제야 비로소 북조선 사람들을 위해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네. 비록 북조선 사람들을 직접 치료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비정상적인 체제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야. 지금으로써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방법이야 못 찾겠나.

샘, 내 긴 편지를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네. 그동안 정말 고마웠네.

현재 한스 마이어는 유럽, 미국, 남조선 등 전 세계를 누비며 북조선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든든한 동지 김복식이 있습니다. 한스와 김복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북조선 인민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지금도 투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치지 못한 편지”를 청취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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