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부 진실을 위해

등록일 2011.08.07


샘, 김복식이 없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쉽지 않구만. 더구나 김복식 대신 내 담당으로 온 박선생이란 사람 때문에 힘든 날을 보내고 있네. 그는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야. 그저 나를 감시하기에 바쁘다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사이인데, 얼마전 내가 큰 사고까지 쳐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비자 련장 때문에 추가로 내야할 서류가 있어서 평양에 갔었네. 일이 끝나고 잠시 호텔상점에 들렀는데, 거기서 누구를 만났는지 아나? 스티브이었네. 자네도 기억나지? 아프리카에 있을 때 내전을 취재하러 왔다가 우리 병원을 방문했던 미국인 기자 말일세. 자네와 고향이 같아서 금방 친해지지 않았나.

녀1 : 이거 어디 거예요?

복무원 : 일본 겁니다.

녀1 : 그거 한번 좀 봅시다.

복무원 : 네, 여기 있습니다.

녀1 : 이 옷 말고 다른 거 또 없어요.

복무원 : 이건 어떠세요.

녀1: ‘네떼르’ 좀 봅시다.

한스 : 오, 스티브! 스티브 맞지. 여기서 자네를 보다니 정말 반갑네.

스티브 : 한스, 이게 얼마만인가. 반갑네. 반가워.

한 스 : 그런데 북조선까진 웬일인가?

스티브 : 소식 못 들었나? 이번에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김정일과 회담을 하기 위해 들어왔네. 난 취재차 따라 왔지. 그나저나, 자넨 북조선에는 언제 온 거야? 아프리카활동 끝나고 바로 왔나?

한 스 : 아니, 독일에서 의사 생활을 좀 하다가, 북조선에 온지는 1년 반이 넘었다네.

스티브 : 그래? 마침 잘됐구만. 이곳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어. 나랑 얘기 좀 하세.

박선생을 비롯해서 스티브와 함께 온 보위원들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네. 우리 둘은 호텔홀에 서서 한참 얘기하고 있는데, 지루했던지 그들이 한 눈을 팔더구만. 샘, 나는 모험을 해보기로 작정했네. 스티브를 만난 건 북조선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우리는 보위원들의 눈을 피해 호텔을 빠져 나왔네. 그리고 김복식을 따라 간 적이 있는 장마당으로 차를 몰았다네.

장마당에 도착하자 스티브는 흠칫 놀라는 것 같더군. 진흙 길 양쪽으로 가득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환영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테니 놀랄만도 했을 거네. 신발도 없이 음식을 구걸하고 다니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는 잠시 할 말을 잃기도 했네. 스티브는 쉬지 않고 카메라 단추를 누르더군.

스티브 : 조선의 진짜 모습이 이거였군.

한 스 : 90년대에 식량난을 겪으면서 이렇게 장마당이 생겼다고 하네.

스티브 : 북조선은 장마당을 인정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장사를 할 수 있는가?

한 스 : 배급을 못 주니까 어쩔 수 없이 허용을 하는 것 같네. 그렇다고 통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장마당이 돌아가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 막지는 못하는 것 같네. 중요한 건 여기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물건 중에 구호물품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는 거야.

스티브 : 정말인가?

한 스 : 저기 쌀 포대를 보게나. 남조선과 미국에서 보낸 쌀이 분명하지 않나?

스티브 : 정말이군.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한 스 : 이게 북조선이네. 굶주리는 인민들에게 줄 식량을 간부들이 빼돌려서 다시 팔아먹는 곳이 북조선의 참모습이지.

스티브 : 그런데 한스, 사회주의국가에서 이 정도로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면 개방에 대한 욕구가 매우 클 텐데, 그런 요구가 직접적으로 표출되진 않나?

한 스 : 북조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곳이야. 워낙 폐쇄적이라 인민들은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네. 또 만약 조선인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한다고 해도 무시무시한 폭력이 그걸 가차 없이 짓밟을 거야. 하지만, 난 이런 상황이 오래 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네. 뭐든지 끝은 있는 법이니까?

스티브 : 자네, 조선에서 느낀 것이 많았나 보군.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네.

한 스 : 장마당 말고도 병원이나 학교에 가본다면 북조선의 실상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될 텐데, 그러지 못해서 정말 아쉽군.

스티브 : 여기까지 데리고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네. 정말 고맙네.

한 스 : 별 소릴 다 하는군. 그런데 오늘 찍은 필름을 가져갈 수 있을 지나 모르겠네. 나도 여러 번 빼앗긴 경험이 있거든.

스티브 : 필름은 빼앗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기억은 뺏을 수 없겠지. 네. 그런데 자네 괜찮겠나? 나야 떠날 사람이지만......

한 스 : 괜찮을 거네. 이래 봐도 북조선에서 공화국 친선 메달을 받은 몸이거든.

스티브 : 아무튼 자네 덕에 중요한 걸 얻고 가네. 나중에 조선에서 활동이 끝나면 나에게 못 다한 이야기 좀 해주게.

한 스 : 그러세. 대신 나도 부탁하나 있네. 자네가 오늘 본 북조선의 실상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알려주게나.

스티브 : 약속하지. 그렇게 하겠네.

세 시간 만에 호텔로 돌아왔는데, 이미 난리가 났더군. 박선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나를 잡아 먹을듯한 기세였다네.

박선생 :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오늘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합니까?

한 스 :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그냥 이런 저런 얘기나 좀 한 것뿐입니다.

박선생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한 스 : 박선생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박선생 : 됐습니다. 이번 일은 저도 그냥 못 넘어갑니다. 각오하십시오!

샘, 나에게 닥칠 일보다는 스티브의 사진이 무사했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다네. 스티브가 조선의 진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나의 행동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을 것 같네.

꽤 긴 하루가 이렇게 가는 군. 샘, 다음에 편지할 때까지 건강하게나.

2000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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