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부 해주에서의 또 다른 시작

등록일 2011.08.07


지난번 휴가를 다녀와서 병원을 옮겼네. 황해도 해주에 있는 병원에 의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주저 없이 자원했다네.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지난 휴가 때 도로에서 마주친 소년의 시체 때문이네. 그나마 관리되고 있는 평양보다는 지방에 내 손길이 더 필요하겠지.

상상은 했지만 이곳 상황은 평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렬악하더군.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면도칼로 수술을 해야할 정도였어. 하지만 평양에서의 경험도 있고, 오래지 않아 필요한 약품과 간단한 치료도구들을 갖출 수 있었네. 금세 자리를 잡아 가니 북조선의 간부들도 나를 좋게 평가하는 것 같더군. 김복식에게 나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고 하네.

김복식 : 숙소도 평양만 못하고, 병원 시설도 락후되어 있어서 일하기 힘드시죠?

한스 : 아닙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다니, 진작에 해주로 올걸 그랬습니다. 휴일이면 김선생하고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도 있고 얼마나 좋습니까.

김복식 : 한스 선생은 정말 고생을 사서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

한스 : 어, 저기 초소가 있는데요?

김복식 : 한스 선생, 그 앞에 있는 담배 한 곽만 주십시오.

김복식이 담배 한 곽을 쥐어준 안전원과 함께 다가오면, 나는 웃으며 메달을 보여주면 된다네. 조선에 들어올 때부터 느낀 거지만 뢰물을 고이지 않고서는 일이 진행되지 않더군.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네.

한스 : 안전원들이 뢰물없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요. 내가 외국사람이라서 더 그러는 것 같습니다.

김복식 : 그런 점도 있겠지만, 지금 조선에선 안 그런 데가 없습니다. 뭐든지 고인 만큼 봐주게 돼 있으니까요.

한스 : 돈이면 다 통하는 세상이 됐다는 말씀인데, 이거야말로 진짜 자본주의 아닙니까?

김복식 : 한스선생은 꼭 이렇게 뼈있는 말을 재미있게 한단 말입니다. 하하

한스 : 김선생이니까 내가 이런 농담도 하죠.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할까요? 력사적으로 보면 어떤 사회든지 운명이 다해갈 때 부정부패가 심해집니다. 게다가 북조선처럼 폐쇄적인 사회는 부정부패 현상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그 규모를 파악하기가 진짜 어렵습니다. 쏘련을 보십시오. 결국 당간부들의 부정부패로 망하지 않았습니까?

김복식 : 한스 선생이 보기에 우리 조선이 곧 망할 것 같습니까?

한 스 : 글쎄요. 제가 아직 조선을 잘 알진 못해서....

김복식 : 당간부들이 문제긴 문제에요. 우리 장군님께서 일을 아무리 잘해 보려고 해도, 아래 간부들이 다들 제 배만 채우려고 하다나니까 결국 조선이 요 모양 요 꼴이 됐죠. 이전에는 남조선보다 북조선이 잘살았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하지만 김복식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네. 김정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말소리가 높아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여서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네.

한스 : 김선생, 저기 언덕 우에서 잠깐 쉬었다 갑시다. 경치가 좋은데요.

김복식 : 그럽시다.

한스 : 좀 춥긴 하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니까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군요. 어, 오늘도 로력동원이 있나 봅니다. 저기.. 저 사람들 말이에요, 오늘 같이 추운 날은 일하기 정말 힘들 텐데. 동복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군요.

김복식 : 로력동원하는데 날씨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라면 하는 거죠. 아마 이 근처 탄광에서 나온 석탄을 옮기고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한스 선생도 이제 조선사람 다됐습니다. 로력동원까지 다 알고.....

한스 : 근데, 매번 저렇게 총 가진 사람들이 주민들을 감시하나요?

김복식 : 아마, 석탄 캐는 일이어서 더할 겁니다. 요즘 석탄이 아주 귀하거든요.

한스 : 안전원은 원래 주민들을 보호하는 게 가장 큰 임무인데, 조선에서는 너무 통제하는 게 많아서, 그걸 감시하는 데 안전원들을 쏟아 붓는 것 같습니다.

김복식 : 보호는 무슨… 뺏어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한스 : 독일에서는 안전원을 경찰이라고 부르는데, 경찰을 민중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법에 따라서 치안을 담당하구요.

김복식 : 텔레비에서 남조선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경찰들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다른 건 몰라도 안전원은 북조선이나 남조선이나 하는 일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다는 아닌 모양이죠?

한스 : 남조선은 시위의 자유가 보장되여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수 있지만, 폭력을 사용하는 등 비법적인 방법으로 사회질서를 어지럽힐 경우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찰들이 통제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경찰입니다. 경찰이 무력과 통제의 권한을 갖는 것도, 인민들을 보호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같은 권한을 인민들이 준다는 것입니다. 즉 인민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경찰도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김복식 : 조선 인민들은 자신들이 안전원들한테 그런 권리를 준다는 생각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장군님의 지시만으로 움직인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요. 한스 선생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좀 헷갈리는 데요?

한 스 : 어찌 안전원 뿐이겠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지요. 거 왜 조선에서 선거를 하지 않습니까? 그게 다 인민들이 자기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가장 큰 수단이 아니겠습니까?

김복식 : 그거야 뭐, 북조선 선거라는게 우에서 찍으라면 찍고, 맹목적인 거예요. 형식밖에 없어요. 어쨌든 한스 선생 말대로라면 안전원이건 당 간부건 간에 인민들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겠군요. 그거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하하

한 스 : 그럼요. 인민이 이 나라의 주인인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한스.김복식 : 하하하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것들이 김복식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오는모양이네. 김복식과 대화를 하면서 조선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언젠가, 그들이 비참한 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분노한 적이 있지? 이제야 그 리유를 알 것 같네.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할 수도 없는 것이네. 조선 사람들이 외부세계의 정보를 듣게 된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겠지만, 모든 정보가 철저히 차단되여 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라네.

내가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을 찾은 것 같네. 그들의 처지를 알려주는 것이네. 김복식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군. 샘, 내 소심한 노력을 응원해주겠나?

1999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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