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부 우울한 휴가

등록일 2011.08.07


샘, 잘 있었나?

얼떨결에 받은 ‘공화국 친선 메달’ 덕에 황해도 바닷가에 있는 휴양지로 휴가를 가게 되었다네. ‘내가 뭐 이런 상까지 받을게 있나’란 생각에 쑥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더군.

운전사, 나, 김복식 이렇게 세 사람만 움직이니 단출하니 좋았네. 잘 닦인 도로는 아니었지만,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것도 려행 기분을 나게 하더군. 그리고 지난번 진경이 일 이후에 김복식이 부쩍 질문이 많아져서 내가 애를 먹고 있네. 이제껏 궁금한 것을 쏟아내기라도 하듯이 묻고 또 묻는다네. 가끔 정색을 하며 따지기도 하고, 리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하다가, 어쩔 땐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내 말들을 새겨 넣는 때도 있다네.

김복식: 한스 선생 궁금한게 한 가지 있는데.. 한스 선생 나라도 둘로 나뉘어 있다가 통일이 됐지요?

한스 : 네, 조선처럼 북남으로 갈라진 게 아니라, 동서로 나뉘었었죠.

김복식 : 저기 근데..통일되고 나서 사람들 살림살이가 많이 좋아졌습니까?

한스 : 아무래도 그렇죠. 그것 때문에 동독 사람들이 통일을 간절히 원했던 거구요.

김복식 : 조선도 빨리 통일을 해야 할텐데, 미국이 가운데 딱 막아서고 있으니, 통일이 안되지요. 조선이 지구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스 : 미국이요? 미국이 통일을 반대한다구요?

김복식 : 대놓고 반대한다기 보다는, 음으로 양으로 이것저것 트집을 잡고 있어요. 꼭 북조선도 남조선처럼 자기네 말을 고분고분 듣길 바란다구요.

한스 : 제 생각은 김선생과 다릅니다. 남조선은 현재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꽤 안정된 나라라고 알고 있어요. 그리고 미국과 우호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이 남조선 정치에 참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마 남조선 사람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북조선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닙니다. 식민지가 없어진 게 언젠데… 좀 유치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확실한 건, 통일이 되면 북조선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물론 성급한 통일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부독일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지만 동부독일과 융화되기까지는 한동안 진통을 겪었거든요.

김복식 : 아니, 같은 민족끼리 서로 어울리지 못한단 말입니까? 서부독일 사람들이 돈 좀 있다고 으시댄 거 아닙니까?

한스 : 민족이라.. 글쎄요. 실생활에 그 민족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지는 모르겠네요. 통일을 생각하다면 좀 더 현실적인 준비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선 북과 남의 경제적 차이가 매우 큰데 이 격차부터 줄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북조선이 중국식 개방을 해야 할텐데 어떻지 될지....

김복식 : 그거야 뭐,,, 우리 조선이 중국 정도로 잘 살게 되면 바랄 게 없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김복식 : 뭐야, 무슨 일이야?

운전수 : 내려가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샘. 난 짐승인줄 알았네. 하지만 앞창 유리 너머로 새까맣게 때가 낀 작은 발이 보이더군.

한스 : 아니… 사람 아닙니까?

김복식 : 한스 선생. 놀라지 마십시오. 아주 가끔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한스 : 어디 봅시다. 어쩌다가.. 이런 한적한 길에서.... 신고해야하지 않을까요?

운전수 : 참. 선생님두, 시절 좋은 얘기 하시네요. 이렇게 죽은 사람들을 다 신고했다가는 오히려 안전원들한테 혼이 날겁니다? 그리고 안전원들이 온다고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귀찮게 뭐 그럴거 있습니까?

김복식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기 다리 쪽이나 좀 들어봐, 길옆으로 옮겨야 가든지 말든지 할꺼 아니야.

운전수 : 아 예, 알겠습니다.

한 스 : 김 선생, 지금 뭐하는 겁니까?

김복식 : 왜 그러십니까, 한스 선생?

한 스 : 지금 그 아이를 길가에 버려두고 가자는 말입니까?

김복식 : 선생이 놀란 건 알겠지만, 저런 꽃제비들은 조선땅 그 어디에나 있습니다.

한스: 뭐라구요? 김선생, 어린 아이가 죽었습니다. 거지 아이라면 이렇게 죽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만약 당신 딸 성희가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면 이 아이처럼......?

김복식 : 한스 선생, 아니 왜 이렇게 화를 내십니까?

한 스 : 김선생, 생명입니다, 생명!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려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김선생 같은 마음으로 숱한 사람들이 이 아이를 그냥 지나쳐 갔을 겁니다. 하지만...... 김선생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김복식 : 후..... 알겠습니다. 그럼 묻어주고 갑시다. 야, 차 뒤에 삽 있지? 가져오라.

운전수 : 그냥 내버려 두고 가면 안됩니까?

김복식 : 야, 잔말 말고 빨리 빨리 움직이라.

너무나 많은 죽음을 경험해서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 그들이 보여준 태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네.

샘, 내가 북조선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건 가난과 아픔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 아니네. 사회 전체를 감싸고 있는 절망스러운 분위기 때문이라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로력도, 불의에 저항하는 분노도, 삶의 환희도 찾아 볼 수 없네. 사고와 감정을 마비시킨 채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네. 어쩌면 내가 치료해야 할 것은 아픈 몸만이 아닌 것 같네.

샘,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이 꼭 내 마음 같네. 곧 눈이 쏟아지겠지. 눈이 내려 복잡한 내 마음과 길가에 묻고 온 아이를 덮어주면 좋겠네.

1999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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