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부 공화국 친선 메달

등록일 2011.08.07


샘, 정말 오래간만에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네. 함께 일하는 간호원 말로는 로력동원기간이라 병원에 올 사람이 없을 거라고 하더군.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며 좋아했는데, 간호원의 말을 듣고 기분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네. 이곳에서는 툭하면 사람들을 동원해 보수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킨다네. 내가 볼 때는 국가가 할 일을 인민들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 추위가 시작됐는데, 떨면서 일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네.

어쨌든 갑자가 진료가 없어지니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모르겠더군.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승용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렸네.

김복식 : 한스 선생! 한스 선생!

한스 : 아니 김 선생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김복식 : 제 딸 성희가 많이 다쳤습니다. 집에 불이 나서 그만…

한스 : 빨리 이쪽으로 눕히세요.

엄마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전기합선으로 불이 난 모양이야. 빨리 불을 끄긴 했는데 성희가 덮고 자던 이불에 불이 붙어서 다리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네.

김복식 : 선생님, 좀 어떻습니까? 괜찮을까요?

한스 : 3도 화상입니다. 응급조치를 해 놓았으니, 일단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빨리 수혈을 해 줘야 합니다. 피부조직과 근육조직이 손상돼서 수혈이 늦어지면 다리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성희가 O형이던데, 김선생은 혈핵형이 어떻게 됩니까?

김복식 : B형입니다. 어떻게 하지요.

한스 : 음…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괜찮을 겁니다.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하니까, 김선생은 밖에서 기다리세요.

자네 기억하고 있겠지? 내 혈핵형이 O형인걸 말일세. 성희를 수술대에 눕히고, 난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네. 내 피를 성희에게 주기로 말이야.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네. 이런 상황이었다면 자네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 거야.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나도 북조선에 와서 영양상태가 안 좋아졌는지 수혈을 끝내고 나니 꽤 어지럽더군.

수술을 마치고 내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간호원한테 얘기를 들었는지, 김복식이 찾아왔다네.

김복식 : 한스 선생, 내가 들은 게 정말입니까?

한스 : 네. 그렇게 됐습니다. 성희가 피를 많이 흘려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김복식 : 정말.....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스 선생한테 큰 신세를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스 : 김선생, 이러지 마세요. 김선생 딸이 아니었어도, 제 피를 줬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김복식 : 아닙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한스 : 너무 그러시니까 오히려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가서 성희를 잘 돌봐주세요. 많이 놀랐을 거예요.

김복식 : 알겠습니다. 한스 선생, 선생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정말 이 악물고 돕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김복식이 날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며칠 후 난 전화 한 통을 받았네. 예전에 그 특급병원에서 자기 안해의 맹장수술을 부탁했던 김부장 기억나지.

김부장 : 일을 잘 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최근에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더군요? 내가 그 소식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그 보고를 받으시고 한스 선생에게 ‘공화국 친선 메달’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물론 내가 잘 보고해 준 덕이 크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한스 : 네, 그렇습니까?

김부장 : 이번 공화국 친선 메달은 외국인한테 주는 3번째 메달입니다. 정말 영광스럽지 않소? 집안의 자랑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아참..그리고 메달을 받은 기념으로 휴양지로 휴가를 보내주시겠다고 합니다. 아직 조선 구경을 많이 못해보셨지요? 이번 기회에 경치 좋은 조선 땅을 좀 다녀보십시오. 구체적인 사항은 김복식 동무랑 의논할 테니, 선생은 그저 려행 준비만 잘 하시면 됩니다.

공화국 친선 메달 수여식은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화려했네. 고위층 간부들과 인도주의 구호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도 여럿 모였더군. 게다가 보도기관에서도 나를 취재하기 위해 왔다네. 졸지에 유명인이 된 기분이었어. 반가운 건 수여식 이후에 오랜만에 소고기로 포식할 수 있었다는 거네. 조선에서 음식 투정 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해서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매끼마다 김치와 밥을 먹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네.

어쨋든 환대를 받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더군. 그런데 더 기쁜 일이 있었네. 짐작했겠지만 김복식이 때문이라네. 수여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김복식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더군. 나는 또 성희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라면 그만두라고 손사래를 쳤다네.

김복식 : 한스 선생, 단순히 성희 일 때문만이 아닙니다. 처음엔 뭐 이런 량반이 있나 싶었는데, 보고 있으면 자꾸 존경심이 생깁니다. 사람으로 태여났으면 선생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선생은 나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한스 선생 같은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이 참으로 궁금하군요. 그리고 우리 성희가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공화국 친선 메달보다 김복식의 진심이 담긴 말을 들은게 더 기뻤네. 낯선 땅에서 얻은 새로운 친구를 자네에게도 꼭 소개해주고 싶군. 샘, 빨리 그날이 오기를 기원해 주게나.

1999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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