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폴란드의 민주화

등록일 2015.10.10


폴란드의 역사를 통해 본 북한과 한반도의 미래

- 뽈스까(폴란드) 와르샤와(바르샤바) 국립대 국제관계학 연구소 김규남 박사

   지난 시간에 뽈스까 인민들이 공산당에 저항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쏘련에 의해 강제로 받아들인 공산주의가 뽈스까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라살림도 제대로 꾸리지 못했습니다.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학교의 지식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공산당 정부는 땅크를 이용해 파업과 시위를 유혈 진압했습니다. 1952년 뽈스까가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뒤부터 1956년, 1968년, 1970년, 1976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전국에서 자유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뽈스까 인민들의 자유를 향한 용기와 외침이 1980년대 드디어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기적의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앞선 시간을 통해 뽈스까의 문화는 로마 카톨릭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1978년 10월 뽈스까 인민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전세계 로마 카톨릭 신자 12억 명의 최고수장인 로마 교황에 뽈스까 사람이 뽑힌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황제도를 시작한 지 약 1400년 만에 슬라브인으로서 처음 교황이 탄생한 것입니다. 새로 선출된 뽈스까 출신의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에 즉위한 뒤부터 수 차례 고향인 뽈스까를 방문하여 대중 앞에서 조국의 자유를 응원하며 기도해 줍니다. 종교가 금지된 공산주의 사회에서 뽈스까 인민은 용기를 얻고 종교의 자유를 위해 더욱 투쟁했습니다. 심지어 공산당 간부들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몰래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는 풍경도 벌어졌습니다. 지금 평양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이 서 있는 만수대 언덕은 본디 장대재 언덕이었고, 이 언덕에는 한반도 기독교 부흥의 본산지라고 불리는 장대현 교회의 정문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북조선에서는 성경을 마음껏 읽거나 기도를 할 수 없고, 자유를 외칠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나누고 있는 뽈스까 인민의 경험이 오늘날 북조선 인민의 고난에 소망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1980년 뽈스까 공산당은 나라살림이 어렵다는 이유로 전국의 물가를 올리고, 인민에게 주던 보조금 액수를 깎았습니다. 가게에 가도 물건이 부족했고, 임금도 깎인 마당에 고기가격이 오르고, 이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할 수도 없자 뽈스까 인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또 한번의 대규모 전국시위가 일어날 분위기였는데, 이번에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를 한다면 예전처럼 땅크로 진압당하거나 체포될 것을 인민들은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고 공장 안에서 파업하며 나라에 대항했습니다. 그리고 당의 간부들이 공장 안으로 들어와 대화로 협상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뽈스까의 노동자들은 1980년 8월 그다인스크 조선소에서 파업을 시작했는데, 노동조합설립을 법으로 보장하도록 요구했고, 표현의 자유와 해고된 동료들의 복직, 임금의 인상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지도자로 레흐 바웬사를 뽑았는데, 이 사람은 조선소의 해고된 전기공이었는데 지도력이 뛰어났고, 3년 뒤에는 전세계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뽈스까 전국 600개 이상의 작업장과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대학의 교수들과 지식인들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전략을 짜주며 도와줬습니다.

   파업규모가 커지자 공산당 정부는 체제위기를 느꼈고, 노동자들과 협상을 벌여 파업 일주일 만에 노동조합 설립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이로써 1980년 9월 쏠리다르노시치라고 불리는 뽈스까 자유노조연대가 탄생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유노조연대를 설립한 지 불과 세달 만에 뽈스까 인구의 1/3인 천만 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한 것입니다. 뽈스까 인민들이 자유를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 이를 통해 뚜렷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희망도 잠시였고, 이듬해 1981년 12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습니다. 야루젤스키 장군은 전국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노동조합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뽈스까 인민의 민주화 운동을 저지했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사라지고, 집회의 자유도 사라졌습니다. 나라살림은 계속 어려운데 인민의 목소리는 무시당했고, 야루젤스키 정부는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뽈스까 인민은 지하조직을 통해 자유운동을 이어갔고, 전 국민의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어두운 뽈스까 사회에 기회가 왔습니다. 1985년 쏘베트연방의 지도자에 개혁과 개방을 지지하는 지도자가 뽑힌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입니다. 고르바초프의 경제개방과 개혁을 통해 공산주의 나라들이 미국과 서유럽 자본주의 나라들과 교류를 더 활발히 하기 시작했고, 뽈스까도 여기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쏘련 모스끄바의 지원에만 의지하던 뽈스까의 야루젤스키 정권도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아는 뽈스까 인민들은 다시 자유를 외치는 시위를 시작했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공산당은 1988년 끝내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다시 협상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국의 반란이 커지면 자신들의 자리와 목숨을 빼앗길 것이라고 판단한 공산당 세력은 1989년 2월 자유노조연대와 원탁에 둘러앉아 체제전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두 달 동안 대화에서 이들은 민주선거를 통해 체제전환에 대한 의견을 묻기로 결정했습니다. 6월에 실시한 총 선거에서 뽈스까 인민은 상원 100석 중 99석을 자유노조연대에게 몰아주었고, 공산당은 단 한 석에 그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하원선거에서도 자유노조연대가 승리하면서 자유와 민주를 외치던 이들이 뽈스까의 새 정부를 만들었습니다. 1989년 12월 뽈스까 인민은 사회주의 헌법을 바꾸었습니다. 뽈스까인민공화국에서 인민이란 글자를 빼고, 뽈스까공화국으로 나라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제 뽈스까 사람들은 공산당의 상징인 인민보다 자유의 상징인 시민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50년에 가까운 뽈스까인민공화국 시절, 뽈스까인들은 끊임없이 자유와 경제개혁을 외치며 공산당과 싸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 결국 자유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희생자들의 명예가 오늘 뽈스까 사회에서 드높이 살아있고, 그 열매가 경제성장이라는 실리와 유럽의 지도국가라는 명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쏘련의 경제개방으로 힘을 얻은 뽈스까의 민주화 운동을 생각할 때, 오늘 중국의 경제개방은 북조선에게 큰 기회입니다. 뽈스까 공산당은 영리하게 판단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민주주의를 허락했습니다. 지금은 옛날 뽈스까 공산당 사람들도 자유를 지지하며 자유세력과 화해하고 함께 민주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조선의 권력자들은 개방의 시기를 자꾸 놓치고 있고, 오히려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을 아직도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의 가난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양은 역사의 교훈을 알고, 이제라도 변화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뽈스까와 북조선이 어떻게 만났고 협력해 왔는지 알아보며, 오늘 뽈스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북조선의 모습도 소개해 보겠습니다.

*북한 청취자를 위해 북한식 표기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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