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가슴속에 묻고

등록일 2013.12.17

정든 고향을 떠나 이곳 서울에 온지도 어언 5년 세월이 훌쩍 넘었습니다. 부르지도 찾지도 예약도 없는 생소한 초행길. 내 삶의 닻을 내린 이곳 서울이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화려한 무대인가 봅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웃어도 보지만 두고 온 자식 생각에 나도 모르게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살아온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요. 몇 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니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리움은 보따리 싸듯 가슴속에 깊이 감춰두고 이곳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집에 가만히 있자니 마음만 절로 괴로워지고 우울증도 생겨 진짜 사는 재미가 없었답니다. 그러던 차에 복지관에서 “실버 예술단”을 조직해 봉사활동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모두 육십을 훌쩍 넘긴 할머니 봉사단인데 노래며 춤을 연습하여 노인정이나 양로원, 경로당에 다니며 공연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이랑 어르신들이 공연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어느새 마음이 흐뭇해지면서 긍지감도 생겼습니다. 이북에 있었다면 언제 이런 무대 활동을 해 보았겠습니까.

자고 나면 끼니 걱정에 오직 장마당으로 향하여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너무나도 행복한 나날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빨리 정착하려면 무엇이든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직업전문학교 건축기능공 도장사반에 입학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젊은이들과 같이 출근길을 함께 걷노라니 나도 모르게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지요. 마음이 한껏 부풀어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지각 한번 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국가 자격증을 취득 했을 때의 기분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처음엔 뼁끼를 이르는 페인트란 말조차 몰라서 애먹었는데 꾸준히 배워보니 그것도 꽤 할 만 하더군요. 하지만 나이 먹어 침침한 눈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면을 그려야 할 때는 제대로 해 낼 것 같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했습니다. ‘내 나이 70에 공부라니’ 하면서요. 그래도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고 시험을 쳤습니다. 좀 창피한 일이지만 세 번 만에 합격증을 받았답니다.

한국에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했답니다. 자격증도 땄겠다, 이번엔 내친김에 현장 일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한 아파트 건설장에 찾아갔습니다. 도장기능사 자격증이 있으니 취업하고 싶다고 했지요.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안 되겠다고 거절당했습니다. 막무가내로 매달려 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좀 더 일찍 한국에 왔더라면 일도 마음대로 하고 얼마나 좋았을까? 이 날처럼 제 나이를 원망해보긴 처음이었지요.

지금은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살면서 컴퓨터는 필수인데 아무것도 모르니 속상할 때가 너무도 많았답니다. 북에 있는 우리 아이들이 이 엄마가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뿌듯해 할까요? 그곳에서는 대학생들이나 하는 컴퓨터를 70살의 고령인 내가 배운다고 하면 믿어나 줄지. 하루 빨리 알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소식조차 전할 길 없는 이 현실이 가슴이 아픕니다. 언제면 통일이 되어 이북의 어른들도 여기 나처럼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참 살 맛 나는 세상입니다.

하루하루 흘러만 가는 시간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고 영어가 하도 많아서 애를 먹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이마트요, 하이마트요, 홈플러스요, 죄다 처음 듣는 말이라 그저 눈치로 살고 자꾸 물어봐야만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다니며 탈북자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터득하면서 진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젠 여기 한국 어르신들의 수준에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는 자본주의 나라 대한민국. 이 나라의 국민이 된 긍지감을 안고 오늘도 내일도 부지런히 배워 한국인의 대열에 앞장서서 위풍당당 걸어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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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7천 탈북자들의 한국살이 이야기 “내 생애 봄날”, 오늘은 이희옥 씨를 전화로 만났습니다.  

CM1 백지영_그대 슬픔까지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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